확실한 취향을 갖게 된다는 건
나도 내가 크림빵을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다.
정확히 작년까지만 해도 나는 디저트를 먹는 것보다는 구경하는 걸 더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내 입맛이 바뀐 건 올해 상반기에 바디프로필을 준비하면서부터다. 탄단지가 균형 있게 짜인 식단만을 먹어야 하는 와중에 가장 금기시되었던 건 바로 온갖 ‘크림류’였다. 트레이너쌤은 말했다. “치킨, 햄버거, 마라탕 이런 건 진짜 먹고 싶으면 적당히 먹고 운동 빡세게 하세요. 하지만! 크림 같은 건 절.대.먹.지.마.세.요.”
바디프로필에 도전하는 내 마음가짐은 꽤나 결연했으므로 평소에도 즐기지 않는 당류에 입이 터질 리 없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몸은 귀신같이 알아차리나 보다. 급격히 떨어진 당 섭취에 촬영 한 달을 앞두고는 내 온 신경은 ‘달달한 것’을 먹지 않는 데에 집중해야 했다. 뭔가를 하는 것보다 하지 않는 게 더 어려울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가령 운동을 아침저녁으로 하는 것, 식단대로 하루 네 끼를 챙겨 먹는 것, 잠을 푹 자는 것은 뭔가를 행하기 위해 의지를 발휘해서 움직이는 것인데도 오히려 쉬웠다. 하지만 부동의 마음을 유지하며 ‘크림빵을 사러 가지 않기 위해 참는 것’에 의지를 발휘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크림빵이었을까?
정확히는 크림이 가득 든 도넛으로 시작했다. 회사 근처에 요즘 유행하는 크림 도넛 가게가 올 초에 생겼는데 외관이 단정하고 깔끔해서 눈에 띄었다. 한 번 들어가 보고 싶어질 정도였지만 하필이면 식단을 시작한 후였다. 벼르고 벼르다가 먹어 본 그곳의 크림치즈 도넛은 정말 환상적인 맛이었다. 한입 베어 물었을 때 차갑고 꾸덕한 크림이 터져 나왔고 빵피는 어찌나 몰캉하고 촉촉한지 입안에서 사르륵 녹아내린다는 표현이 딱 어울렸다. 식단을 하는 4개월 동안 참고 참다가 한 번씩 크림 도넛을 사 먹으며 모든 게 끝나면 내 꼭 이 맛있는 크림 도넛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와구와구 먹겠노라 다짐했다.
마침내 촬영이 끝나고 나의 크림 도넛 도장 찍기가 시작되었다. 스튜디오에서 나오자마자 향한 곳도 거기서 제일 가까운 도넛 집이었고 다음날 출근길엔 회사 근처에서 크림 도넛을 많이 사서 동료들과 나눠 먹었다. 이틀에 한 번 정도는 크림 도넛을 먹었던 차라 살짝 물릴 때쯤 SNS에서는 연세우유크림빵이 입소문을 타고 퍼지기 시작했다. 유행하는 음식을 꼭 챙겨 먹는 타입은 아니지만 연세우유크림빵을 만든 경력 8개월, 96년생 신입 김 MD 님의 인터뷰를 본 후로 그 빵이 궁금해졌다.
공장 기계만을 이용해 빵에 넣을 수 있는 크림의 최대 용량은 70g인데 크림 비율을 최대로 늘리기 위해 공장 직원 10명가량이 수작업으로 크림 기계를 돌려 5~10g 정도의 크림을 더 넣고 있다고. 메론빵의 경우 출시 직전까지 100개 이상의 메론빵을 먹어보면서 고민했다고. 저가 빵이라고 알려져서 큰 기대를 하지 않는 편의점 빵에 대한 인식을 바꿔 보겠다는 야심 찬 포부를 가지고 6개월 동안 여러 노하우를 열심히 모아서 만든 빵이라니.
어느 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득 생각나서 CU에 들러 보니 메론빵 하나가 남아 있었다. 마침 내가 파리바게트에서 제일 좋아하는 빵이 메론빵이다. 겉면의 바삭한 쿠키가 식감을 살려주고 은은한 메론 향이 아주 매력적인 빵이다. 집으로 가는 길에 딱 한입만 먹어보자고 개봉해서 베어 문 순간, 홀린 듯이 전부 먹어 버렸다.
일단 한입 먹는 순간 압도적인 양의 크림이 빵 내부에 들어찬 게 보인다. 그걸 본 이상 아껴서 야금야금 먹는 건 불가능해진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진.짜.맛.있.다. 메론크림빵 겉면이 너무 눅눅하다, 크림이 한쪽으로 쏠려있다(?), 빵이 생각보다 퍽퍽하다 등등 야박한 평을 던지는 분들도 종종 있던데 크림빵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일 거다.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편의점 빵에 맛있는 우유 크림이 이렇게나 가득한데 어떻게 유명 부티크 빵들와 비교하는 잣대를 들이대려고 하는가. 전국 어디에 있든 CU에만 가면 이 균일하게 맛있는 크림빵을 먹을 수 있다는 건 정말 감동적인 일이다.
물론 포켓몬 빵만큼은 아니지만 이 크림빵도 유명세를 치르는 탓인지 그때그때 먹고 싶은 맛을 단번에 구하기는 어려웠다. 메론크림빵을 찾느라 근처의 CU 다섯 군데를 매의 눈으로 샅샅이 뒤져야 할 때도 있었고 포기하는 심정으로 오리지널 우유크림빵을 먹는 날도 있었다. (이것도 평균보다 맛있긴 맛있으나 똑같이 먹고 똑같이 살찔 거라면 더 맛있는 메론을 먹겠다!)
그러다가 슬슬 초코크림빵도 체험할 때가 된 거 같아서 어느 날엔 애인과 맘먹고 CU 편의점 순례를 했다. 꼭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생크림, 생크림팥, 메론 전부 있었는데 어딜 가든 초코만 없었다. 먹고 싶은 걸 제때 먹지 못하는 나의 상심은 남들보다 좀 더 유별나다는 걸 아는 내 애인은 나를 카페에 앉혀두더니 얼마 안 있어 뿌듯한 얼굴로 초코크림빵을 들고 나타나 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처음 먹어본 초코크림빵은... (말해모해)
파리바게트에서 제일 좋아하는 빵이 메론빵이었다면 지금까지 내 최애 편의점 빵은 초코롤빵이었다. 오독오독 씹히는 그 초코칩 맛을 좋아했는데 연세우유 초코크림빵은 초코빵 러버들이 환장할 그 포인트를 잘 잡은 거 같다. 찐득하고 묵직한 초코크림 안에 초코칩을 더해서 씹는 맛까지 단번에 살려버린! 그야말로 갓벽한 초코크림빵이다.
뚜렷한 취향을 갖게 된다는 건 참 좋은 일이다. 연세우유크림빵을 먹은 후로 나는 나만의 확실한 취향을 하나 더 갖게 되었다. 가장 좋아하는 빵이 무엇이냐? 가장 좋아하는 편의점 간식이 무엇이냐? 최근에 먹은 것 중 가장 맛있는 것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나는 아무 고민 없이 곧바로 대답할 수 있다. ‘연세우유크림빵’이라고.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어마어마한 칼로리다. 빵 자체도 엄청 크고 크림이 그만큼이나 들었으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크림빵도 제로 음료처럼 최대한 저칼로리로 맛있게 먹을 수는 없을까? 상상해봤지만 아직까지는 현실로 이뤄지지 않을 일이다.
그래서 나는 아무 때나 이 맛있고 위험한 행복을 남발하지 않는다. 내가 뭔가를 잘 해냈을 때 나에게 주는 선물로 이 빵을 활용하고 있다. 소소한 자기관리 뒤에 큰 포상이 있다는 걸 스스로도 자각하고 있으면 삶이 좀 더 달콤하고 풍요로워지는 기분이다.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헤아려 보자.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좋아하는 게 많다는 건 쉽게 행복해질 수 있는 경로가 많다는 것이니까.
기분 좋은 금요일 저녁이다. 멋진 주말이 기다리고 있다. 도무지 낫질 않는 감기몸살로 힘든 한 주를 보냈으나 운동도 네 번이나 가고, 퇴근 후에도 집에서 할 일을 척척 잘 해낸 나에게 주는 선물로 오늘은 오랜만에 연세우유크림빵을 먹어야겠다. 사자마자 뜯지 말고, 집에 고이 가져가서 냉동실 1시간 얼빵으로 먹어야지. 집 근처 CU 편의점에 메론이나 초코빵이 나를 딱 기다려 주고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