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지 않기에 낭만적인 말: 궁금했던 형태소들(2)
최근 오랜 친구와 진하게 술 한잔 하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학창시절 추억, 최근 회사에서 괴로웠던 일들, 반복되는 만남과 헤어짐에 대해서. 그리고 술자리가 무르익어 팔팔 끓던 어묵탕이 미지근해질 때쯤에는, 우리가 아직 세상을 다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제 더 이상 ‘어리다’라고 말할 수 없는, 말해서는 안 되는 나이구나. 하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친구는 말했습니다. 인생 참 부질없다고요.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만 그래도 내일의 갓생을 또 살아가기 위해서는 긍정의 기운을 조금이라도 불어 넣어야 했기에 저는 꼭 그렇지많은 않다는 것을 말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니야 꽤 “부질있어.” 라고 소리를 뱉으려고 했는데, 그 낯선 단어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부질있다? 부질있다. ‘부질없다’의 반대말이 ‘부질있다’일까? ‘없다’의 반대말이 ‘있다’이므로 필시 그럴진대, 그렇다면 ‘부질’은 무엇인가. 또다시 제가 알지 못하는 형태소와 마주하게 되었습니다.(궁금했던 형태소들(1) 참고)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열심히 찾아 보았는데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부질있다’라는 말은 없다고 합니다. ‘부질’은 ‘없다’랑만 붙는 말이라고요. 아니, 없기만 하고 절대 있을 수 없는 말이라니. 어쩐지 애처롭고 낭만적이잖아.
부질은 그 유래가 아직 모호하지만, 어쨌든 ‘불질’에서 ‘ㄹ’이 탈락한 형태로 보는 의견이 가장 유력한 것 같습니다. 쇠붙이를 만들 때 불질을 해서 단단하고 강하게 만들어야하는데 불질을 하지 않은 쇠붙이는 금방 휘어져 쓸모가 없지요. 그래서 부질없다(불질없다)는 소용없다, 쓸모없다 의미를 갖게되었다고 추측한다고 합니다. 또 다른 가설로는 불질이 불을 피울 때 불에 바람을 불어넣는 일인데, 이 불질을 하지 않으면 불이 붙지 않아 또 소용이 없다, 불이 타오르지 않아 결과를 낼 수 없다. 이런 의미였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부질 자체가 소용, 쓸모의 의미로 지금 쓰이는 단어로 아니니 독립적인 형태소로 볼 수는 없겠네요.
저는 이처럼 애처럽고 낭만적인 것들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보았습니다. 의외로 꽤 많았습니다. 속절없다, 어이없다, 하염없다, 하릴없다, 영락없다, 속절없다, 손색없다, 터무니없다, 느닷없다, 덧없다, 뜬금없다…. 그중에서 뜻을 알 수 있는 것들은 제외하고, 의미를 가늠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보았습니다. 당연하게도 ‘○○없다’의 반대말로 ‘○○있다’를 쓸 수 없는 예시들이기 때문에 ○○이 하나의 단어로서 사전에 등재되어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형태소였다면 아마 ○○있다라고 쓸 수 있을 확률이 더 높았겠지요.) 그래서 공식적으로 사전에서 찾을 수는 없지만, 관련 사료가 남아있거나 국어학자들의 의견이 어느 정도 모아진 내용들 위주로 찾아 보았습니다.
‘느닷없다’의 ‘느닷’은 어떤 일이 일어날 징조나 이유라는 뜻이라고 하는데요, 원래는 ‘늦+닷’이라고 하고 ‘늦’은 징조 기미를, ‘닷’은 따락 이유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늦없다’, ‘닷없다’의 형태로 쓰인 기록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늦’과 ‘닷’이 합쳐지면서 편의상 ‘ㅈ’이 탈락하여 ‘느닷’이 되었으며 ‘느닷없다’는 어떠한 징조나 이유 없이 갑자기 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고 하네요.
‘덧없다’의 ‘덧’은 사전에 그 의미가 밝혀져있는데요, [얼마 안 되는 퍽 짧은 시간, 매우 짧은 시간]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인생 참 덧없다’라고 할 게 아니라 ‘인생은 참 덧이다’라고 해야 맞을 것 같은데요. 어쩌면 ‘덧’이라고 불리우는 그 짧은 시간조차 없을 만큼 무상하다, 의 강조의 의미였을 거라고(지금은 강조의 의미까지는 아니겠지만) 생각해도 좋을 것 같네요.
‘뜬금없다’의 ‘뜬금’은 일정하지 않고 시세에 따라 달라지는 값이라고 합니다. 마치 경매처럼요. 예전에는 소비자희망가가 정해진 정찰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시장에서 거래를 할 때 반드시 이 ‘뜬금’을 정해야만 했다고 해요. 그런데 이 뜬금이 없었다면 거래도 할 수 없고 당황하고 황당한 일들이 벌어졌겠지요. 상호 협의되지 않은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생기는 일, 그게 바로 ‘뜬금없다’의 의미가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터무니없다’의 ‘터무니’는 비교적 유추해 보기 좋은 단어인 것 같네요. 터무니는 ‘터를 잡은 자취’ 라는 뜻이라고 하는데요. ‘터+무니’ 혹은 ‘터문’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의견 등이 있는데 공통적으로 ‘터’는 우리가 알고있는 집터를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그러니까 기둥을 놓았던 자리나 흔적이 없다, 즉 근거가 없고 허황되다는 뜻으로 쓰이게 된 거라고 볼 수 있겠네요.
열심히 알아보아도 ‘하염없다’의 ‘하염’, ‘하릴없다’의 ‘하릴’ 등은 그 기원을 찾을 수 없었어요. 언젠가 국어를 연구하시는 분들이 이 미스테리한 단어들의 고향을 찾아 주시기를 기다리는 수밖에요. 세상에 없을 수만 있고, 있을 수도 없는 것들이 이렇게나 많았다니 신기하네요. 궁금해하지 않았다면 이 애처로운 것들에 대해 알 기회가 없었을 텐데, 이렇게 알게 되니 더 소중한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엔 어떤 형태소들이 저에게 물음표를 던져 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