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보내는 사람이고 싶다. 죽음의 입구에서 지나온 삶을 되돌아볼 때 어떤 후회막심이나 아쉬움이 없었으면 좋겠다. 이만하면 내 인생은 눈부셨다고, 소박한 멋과 작은 행복들이 별처럼 총총한 삶이었다고 회고하고 싶다.
대단한 부귀영화를 꿈꾸지 않는다. 그런 것은 쉬이 변하기 마련이고 나는 그 엄청남을 감당할만한 깜냥이 되지 않는다. 세월은 강산도 변하게 한다지만 나는 한번 세운 중심을 흔들고 싶지 않다. 모진 풍파에 허리가 휘어도 다시 일어나는 꿋꿋함으로, 조금 부서지더라도 금세 뚝딱뚝딱 고쳐내는 굳건함으로 인생을 헤쳐나가고 싶다.
어릴 적에는 누가 행복하냐고 물으면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집안이 넉넉지도 않고 예쁘지도 않고 공부를 잘하지도 못했지만 행복은 작은 가슴 가득히 품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행복하냐는 질문에 그렇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가진 것이 많고 마음 내키면 어디로든 떠나거나 갖고 싶은 물건을 살 수 있는데도. 지난 몇 년은 행복함이 어떤 느낌인지도 잊고 살았다. 행복함을 다시 느끼려 애쓰지도 않았다. 노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돈을 모아 두고 속세의 가치에 충실하면 열심히 사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직 젊고 건강하므로 사서 고생해도 된다고 스스로를 타이르며 하루도 쉬는 날 없이 일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이 모두가 나를 들여다보지 않았기에 벌어진 그릇된 판단이요, 어리석은 자만이다. 지난날 나는 왜 고독의 가치를 몰랐을까. 늦은 밤에 밀려드는 공허와 허무를 왜 소유로 채우려 했을까. 왜 책을 일상의 양식으로 삼지 않고 현실로부터의 도피처로 삼았을까. 수백 권의 책을 읽었어도 지금은 무엇 하나 남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책은 세상을 잊는 수단이 아닌 삶을 마주하는 통로다. 고독은 내면의 눈이 더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도록 시름과 번뇌를 걷어내준다. 텅 빈 마음은 물질이 아니라 질문으로 채워야 한다. 이제야 깨달아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싶냐고.
30대 후반은 죽음을 생각하기에는 이른 나이다. 그러나 죽음이 나이를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는 사실은 아주 잠깐 주변을 둘러보면 알 수 있다. 어느 날 비명에 가더라도 후회가 없도록, 나를 떠나보낸 이들이 가슴 치는 일 없도록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프랑스 철학자 몽테뉴는 <수상록>에 이렇게 썼다.
죽음이 어디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니 모든 곳에서 죽음을 기다리자. 죽음에 대해 미리 생각하는 것은 곧 자유에 대해 미리 생각하는 것이다. 죽는 법을 깨우치고 나면 반대로 죽음에 속절없이 당할 거라는 두려움을 잊게 된다. 죽음이 뭔지를 알면 모든 굴복과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삶을 박탈당하는 것이 해악이 아님을 깨닫고 나면 삶에 해로운 것이 하나도 없게 된다.
어떤 사람이고 싶은가, 라는 질문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 라는 질문과 같다. 몽테뉴가 말하듯 임종에서 의식이 혼미할 때 남기는 말이 진정한 사람됨을 드러내 준다면 평소 어떤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살았는지가 중요하리라.
원하는 바와 요구받는 바를 순리에 맞게 조화하는 기술을 연마하자. 자아의 중심을 다지는 일은 중요하지만 융통성 없는 아집은 자신에 대해 잘 모르는 것 못지않게 무익하다. 때론 나보다 타인의 눈이 더 정확함을 명심하자.
작은 것에 집중하자. 길가에 핀 이름 모를 풀꽃과, 많이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목소리와, 어린아이의 해맑은 웃음과, 지금 내 곁에 있는 이들에게 시선을 두고, 큰 흐름에 몸을 맡기자. 내일 일을 예측할 수 없는 것처럼 세상이 흐르는 방향은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오늘 내가 하는 행동과 말, 지금 읽는 책과 지금 듣는 목소리가 미래의 나를 만들고 미래의 세상을 이룬다는 것을 명심하자.
오래 묵은 장처럼 성숙한 사람이고자 한다. 세상 일을 근거 없는 낙관으로도 지나친 비관으로도 환원하지 않고, 타인을 내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으며, 하려는 말이 시기적절한지 생각한 후에 이야기하고, 분노하게 되면 그 근원을 따지는 신중함을 갖추자. 삶에 이로운 분노는 되새김질하되 아무 때나 분출하지 않고, 나에게나 남에게나 해로운 분노는 삭여 없애자. 마음을 다스리는 데는 명상만큼 좋은 약이 없다.
큰 목표를 세우되 실천은 일상에서 꾸준하게 할 수 있는 일들로 하자. 옛사람의 사상을 공부할 때는 한 문장씩 외워 암송하고, 글을 쓸 때는 한 문장을 쓰더라도 군더더기 없도록 쓰자. 보이지 않는 내면은 말과 글로써 드러난다. 이 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물질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 영원할 리 없는 가치를 위해 결코 시간을 희생하지 않으리라. 쉬고 싶을 때 쉬며, 쉼은 영혼을 기쁨으로 충만케 하는 일과로 채울 것이다. 이를 위해 값싼 쾌락과 일회성 소비에 몸과 마음을 내주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관대하자. 사소한 실수를 저질렀다고 자책하지 말고, 조금 게으름 피웠다고 스스로를 깎아내리지 말자. 이제까지 쓴 말들을 지키지 못하는 날이 있어도 사람이기에 그럴 수 있다고 관용하는 여유로움을 지녀야 한다. 사람이기에 지켜야 하는 윤리에는 엄격하되 사람이기에 필연적인 불완전함을 수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타인에게도 그렇다. 나에게 관대한 만큼 남에게도 관대해야 어긋남이 없다.
이것을 잊지 않으면 나는 기꺼이 행복한 사람으로 죽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