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셔츠를 입으려니

by 양진건



붉은 셔츠를 샀다. 막상 입으려니 사실 좀 당황스러웠다. 아내는 그것을 사줄때 "용기가 있으면 입어보세요" 라고 했다. 붉은 셔츠를 입어보겠노라는 나의 선택이 여간 마땅치 않았던게 틀림없었다.

어쩌면 거두절미하고 그냥 "입어보세요"만 했더라도 나는 그것을 굳이 안샀을지 모른다. 그 "용기가 있으면"이라는 단서가 문제였다. 결국 "당신은 용기가 없으니 붉은 셔츠는 못입을 것이다"라는 지레짐작을 어김없이 깨뜨리고자 나는 분기탱천했던 것이다.


사실 그건 오기였다. 친구가 외손자를 보았다고 자랑을 할 때 나는 그 친구를 다시는 보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니 생각해보라. 환갑에 할아버지 소리를 듣는다는 것이 그렇게도 좋아 멀리 서울에서 그것도 아침 일찍부터 전화란 말인가. 그래서 나는 축하한다는 말 대신에 "너만 할아버지 해라"라고 오히려 핀잔을 주었다. 오기였다.


그러나 어쩌랴. 그것이 현실인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 오기를 부려 붉은 셔츠를 샀던 것이다. 그것도 보통 붉은색이 아니라 화려한 붉은색이었다. 그것을 입은 나를 보더니 막내 딸은 "아빠 축구 응원가세요?" 하며 혀를 찼다. 내가 스포츠에는 관심이 전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막내 딸은 그러니까 아내와 같은 입장이었다.


아니, 왜들 그런가? 내가 무슨 1960년대 마오쩌둥(毛澤東)을 지지했던 홍위병(紅衛兵)이라도 된단 말인가? 아니면 중국 원나라 말기 붉은 두건을 두르고 일어난 홍건적(紅巾賊)처럼이라도 보인다는 말인가?


그러나 나 홀로 거울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거기 홍건적도 홍위병도 아닌 붉은 셔츠의 쓸쓸한 초입의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비장한 모습이 혹시 샤갈의 <붉은 유대인>이 아닌지 착각했지만 분명히 나였다. 붉은 색 때문인지 흰머리는 더욱 희게 보였고 눈두덩은 더욱 두터워보였다. 그렇게 퇴색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쯤해서 붉은 셔츠를 포기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겠지만 나는 그것을 입었다. 그 붉은 셔츠에는 늙어간다는 것의 무력감, 우스꽝스러움, 외로움이 적나라하게 묻어 있었다. 그것은 째깍째깍 흐르는 시간 속에서 거칠게 잠식당하고 있는 우리들의 색깔이었다.


어쩌면 아내의 말대로 이제부터 진정한 용기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불멸에만 관심이 있던 젊은 시절이 가고 죽음에 대해 진정으로 생각할 수 있는 계절들이 돌아오고 있음을 직시할 수 있는 용기. 큰 바다로 멀리 헤엄쳐나가듯 자기 욕구가 좌절되지 않으려고 삶에서 발버둥쳤지만 이제 어김없이 닥쳐오는 질병과 노쇠를 직시할 수 있는 그런 용기말이다.


구태여 변명한다면 그런 용기를 얻고자 나는 붉은 셔츠를 용감하게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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