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 큰 소나무 부러지다

변시지 그림에 양진건 시

by 양진건

키 큰 소나무 부러지다

사랑이 그렇듯

애초 숲은 아무것도 없는 땅에서 시작된다.

일년생 풀이 들어오고, 뒤이어

여러해살이 풀들이 일년생 풀들을 뒤덮고, 어느덧

키 작은 나무가 들어와 여러해살이 풀들을 밀어내면

한동안은 작은 나무가 우거진

관목림의 천지.

사랑도 온갖 시련을 거치듯

그러나 관목의 시간도 오래가지는 못하고

키 작은 나무 다음에 눈, 비로 소나무가 자라면서

그 거친 세월을 보내다보면

세상은 이제 온통 소나무 숲으로 변한다.

아라동 제주대학교 안쪽의 소담한 소나무 숲도

그렇게 만들어진 것일 텐데

오후의 끝 무렵,

그대와 몰래 그 숲에 들어설 때마다 마주하던

곧고, 굵은 열주(列柱)들이여.

하늘로만 향하던 상상력이여.

그것을 두고 절정의 우리들 사랑 같다고

그대와 나는 손가락 걸며 여러 번 단언했지만

그러나 섬을 흔드는 태풍으로

그 숲의 소나무마다 생채기를 마구 드러냈을 때

문득, 내가 목격한 것은

아, 우리들 사랑의 숨은 정체였다.

폭풍의 바다 / 변시지


<"폭풍의 화가"라 불리는 변시지는 1926년 제주도에서 태어나, 1945년 오사카 미술학교를 졸업, 조선인 최초로 일전(日展)에 입선하였으며, 1948년 일본의 최고 중앙화단인 광풍회의 최고상을 수상하였다. 1957년 한국에 돌아와 서라벌 예술대, 한양대 등에서 가르쳤으며, 1975년에 제주대학교로 옮겨 작품활동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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