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리스본 라디오 - On Love
오래 라디오 작가로 살았습니다. 십몇 년쯤 된 가을엔 그저 라디오 원고를 묶어서 책으로 냈는데 졸지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어요. 어리둥절한 일이었죠. 책 제목이 <그래도, 사랑>이었던 탓에 아주 많은 사람들이 제게 사랑을 질문하기 시작했는데 만날 준비가 되지 않아서 오히려 반대로 숨기만 했어요. 일단 답할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사랑에 답이 어디 있겠냐요. 각자의 사정이 있을 뿐이죠.
3년이 더 흘러 <그래도, 사랑> 후편 <다시, 사랑>도 내고, 김환기 김향안 부부 러브 스토리를 담아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라는 책도 낸 다음에 작업실 한 켠에 서가를 두고 서점을 열었어요. 문 앞에 <사랑에 관한 주말 서점 – 당신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책을 추천해드립니다>라고 붙여두었죠. 굳이 찾아와야 하는 아파트 상가 3층 구석방이었는데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찾아와서 자기 사랑얘기를 하고 책을 받아갔습니다. 손님들은 하나같이 결이 고왔고 다정했으며 ‘작가님 얘기에 용기를 얻어서 고백했고 연애를 시작했어요’라는 얘기를 들으면 ‘내가 세상에 좋은 것을 남기고 가겠구나’ 안도가 되었습니다. 보람과 자부심이 어떤 식으로 나를 지키고 성장시키는지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인생의 두 번째 직업으로 서점 주인을 택했어요. 1층으로 내려와 제대로 서점을 열었습니다. 20년이나 해왔던 라디오 일을 멈추기로 결정한 다음이었죠. 라디오와 완전히 결별한 것은 아니었어요. 라디오에서 하고 싶었지만, 시스템 문제로 할 수 없었던 일들을 서점으로 옮겨왔다고 보면 될까요.
이제 사람들은 서점으로 찾아와 저에게 사랑을 질문합니다. 손님이 없는 날엔 시간을 낼 수 있지만 북적이는 날엔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 없어 보낼 때 마음이 좋지 않았는데 유난히 붐비던 주말이었어요. 가득하던 손님들이 한순간 썰물처럼 빠져나갈 때가 있어요. 의자에 몸을 묻고 앉았는데 목소리가 들립니다. “작가님, 저 책 좀 추천해주세요.” 고개를 돌려보니 말간 여성이 펑펑 울며 서 있었습니다. 1시간 정도 서가 앞에 있길래 책을 꼼꼼히 보는구나 했더니 조용히 얘기할 수 있는 타이밍을 기다렸던가봅니다. 책장 앞에서 1시간을 남몰래 울고 있었던 거죠. 놀라서 창가 테이블에 앉히고 차를 내려주었습니다. 한참이나 울더니 웃으며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정기적으로 시간을 만들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말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고,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사랑이 아픈 날에는.
<실연당한 사람들의 7시 조찬 모임>에서 이름을 따서 <사랑이 어려운 사람들의 8시 저녁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매주 열었는데 몇 달이 지나도록 아이돌 콘서트 티켓팅보다 어렵다, 광클이 필요하다며 농담하시는 분도 계셨어요. 대답했습니다. “사랑이 모두에게 어렵다는 증거일 거예요. 원래 어렵다, 모두가 어렵다. 좀 안심이 되지 않나요?”
한 사람은 울고, 한 사람을 티슈를 건네고, 한 사람을 덩달아 웁니다. “언니! 멋져요! 울지 마요! 힘내요!” 응원하는 소리에 다 같이 소리 내서 웃기도 합니다. <사랑이 어려운 사람들의 8시 저녁 모임> 풍경이에요. 이야기를 하다보면 12시가 넘기 일쑤라 서점주인이 결국 병이 나서 현재는 한 달에 한 번만 열고 있지만 역시나 경쟁이 치열하고 ‘언제 열리나요?’라고 문의가 끊이질 않아서 다른 방법을 찾았습니다.
일요일 밤 10시면 라디오로 만나기로 했어요. 진짜 라디오는 아니고 인스타 라이브인데 제목을 <리스본 라디오, On Love>라고 붙인 거죠. 저희 책방 이름이 <서점, 리스본>이거든요. 사랑에 대한 사연을 받아 같이 이야기하면서 책 이야기, 영화 이야기를 나눕니다.
일요일 밤 10시가 되면 라디오가 시작됩니다. 인스타 라이브지만 검은 화면입니다. 라디오니까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보이지 않지만 느껴지고, 사라지지만 기억에 남아 있는 것. 제가 생각하는 라디오입니다. 리스본 라디오에서 나누었던 이야기 중 남겨두고 싶은 몇몇을 앞으로 여기 지면에 차곡차곡 담아볼까 합니다.
사랑을 할 때 절대로 잃지 않았으면 하는 것은 인생과 관계에 대한 주인의식입니다. 주체적으로 관계를 만들어가면 좋겠다고 이야기하면서, 지난 겨울 서점에 찾아왔던 대학생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역시나 손님이 다 빠져나간 뒤에 말을 걸더군요.
“작가님, 책 좀 추천해주세요.”
“어떤 이유로 책이 필요할까요?”
“저기요, 이 라이더 자켓 말이에요, 제 것 아니에요.”
팔에 걸치고 있는 라이더 자켓을 가리킵니다. 뜬금없이 왜 옷 이야기?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습니다.
“아르바이트 하는 곳에서 마음에 드는 남자애를 만났어요. 저보다 동생이었는데, 그 애가 좋아서 자주 메시지 보내고 했거든요. 저한테 관심이 없는지 일주일이 지나서 답하고 반응이 없더라고요. 몇 번 더 노력해봤는데 시큰둥하길래 나에게 관심이 없구나 싶어서 마음을 깨끗하게 접었어요. 아르바이트도 옮겼는데 며칠 전에 메시지가 온 거예요. <누나, 나 군대 가. 입대영장 받고 누나 생각이 제일 먼저 났어>. 그래서 만나기로 했는데 친구들이 절대 나가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나쁜 남자라고. 그 애가 저를 갖고 놀 거라면서 말리더라고요. 그 애가 절 갖고 놀지 못하게 쎈 이미지 보여주려고 라이더 자켓을 입고 싶었어요. 하지만 옷은 없고 사려니까 비싸서 학교 커뮤니티 게시판에 올렸더니 어떤 분이 빌려주셨어요!! 이런 저에게 추천해주실 책이 있을까요? 책 읽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그 애를 만나려고요.”
“실망인데?”
“네?”
“세상이 변했는데, 아직도 ‘남자가 여자를 갖고 놀 수 있다’고 생각한다니. 그것도 대학생이. 실망이야. 어떻게 감히 사람이 사람을 갖고 놀 수 있지?”
라이더 자켓을 끌어 안고 있던 학생의 눈동자가 커졌다.
“관계를 주체적으로 맺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만나고 싶죠?”
“예! 이미 약속했어요.”
“그럼 만나요. 군대 가기 전의 센티멘털이니 뭐니, 걱정할 필요 뭐 있어요? 학생 마음이 제일 중요하지 않을까? 걔가 만나고 싶어해서 만나는 게 아니고, 내가 만나고 싶으니까 만나는 거예요. 만나보니까 좋고 재밌고 잘 통하면 친구들이 뭐라고 하든 또 만나요. 만나보니까 생각보다 별로일 수 있어요. 그럼 안 만나면 되요. 심플하잖아. 대부분은 자기가 원하는 게 뭔지 몰라서 헤매는데 학생은 자기가 원하는 게 뭔지 정확히 알잖아요. 그 자체로 멋진 건데 뭐가 걱정일까요?”
학생은 명쾌한 얼굴로 돌아갔어요.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얘기가 담긴 책을 두 권 라이더 자켓 옆과 같이 꼭 안고서 말입니다. 이후로도 자주 서점에 찾아오지만 ‘전에 말한 어떻게 됐나요?’라고 묻지는 않아요. 스물 서너 살의 사랑이란 한여름날 판타지아 같아서 불꽃놀이였다가 소나기였다가 꿈결이었다가 나락이기도 한 게 자연스러운 거니까요. 묻지는 않지만 그녀는 알 거예요. 어떤 사랑을 해도 서점주인은 응원할 거라는 것.
“어려워요.”라고 하면 “맞아요, 어려워요”, 그 정도밖에는 대답 못하는 게 사랑이지만 들어주는 사람이 있고 대답해주는 사람이 있어 한결 견딜만해지는 것이 또 사랑이 아닐까 해서 <온에어> 불빛을 켜두고 귀를 열어둡니다. 리스본 라디오, On 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