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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점 리스본 May 07. 2019

"서점이 저의 생명을 구했어요."

"작가님. 정말 고맙습니다. 작가님이, 아니 서점 리스본이 제 생명을 구했어요."


꽃을 주며 단골 청년이 말했다. 


"제 머리 말이에요. 탈모가 진행되고 있어서 고민이었는데 새 생명이 나기 시작했어요. 작가님이 좋은 사람을 찾아주신 덕분이에요."


그는 우리 서점에서 사랑을 만났다. 


처음 그가 서점을 방문한 것은 오픈하고 2주쯤 지나서였다. 문턱을 넘어설 때부터 이미 품에 커다란 책을 들고 있었다. 왼쪽 끝부터 오른쪽 끝까지 맨 위에서 맨 아래까지 그는 눈으로 책등을 하나하나 쓸었다. 마침내 골라든 것은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이었다. 계산을 끝내고 그는 말했다.


"열화당 말이에요. 디자인이 정말 아름다워요. 특히 존 버거 책이요."
"존 버거가 마음에 든다면 <아내의 빈 방>을 놓치지 말아요."


존 버거의 책들은 모두 랩핑이 되어 안을 볼 수 없게 되어 있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내 책을 보여주었다. 청년을 눈을 떼지 못했고 양손에 한 권씩을 나눠쥐고 고민에 빠졌다. 


"실은 오늘 책을 너무 많이 사서 한 권만 살 수 있어요."

"<아내의 빈 방>을 원한다면 이미 계산한 걸 취소해줄 수 있어요."


존 버거가 세상을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며 글과 그림을 담았다. 아들 이브 버거가 사진을 찍었다. <아내의 빈 방>을 들고 그는 즐거운 얼굴로 돌아갔고 일주일에 한 번씩 서점에 들르다가 이틀에 한 번씩, 나중에는 매일 서너번씩 들르는 단골이 되었다. 


비슷한 여인이 하나 등장했다. 매주 한 두번 찾아와 책장을 맨 왼쪽에서 맨 오른쪽까지 가장 위에서 가장 아래까지 꼼꼼히 흝어보고는 딱 한 권을 골라갔다. 다 읽고 나면 또 찾아와 매번 똑같이 했다. 낯가림과 수줍음이 많아 계산을 할 때쯤에야 "지난 번에 권해주신 책 정말 좋았어요. 특히 좋았던 부분은요." 라며 입을 열었다. 한 방울 한 방울 물감을 떨어뜨려 서서히 번져가는 듯 인연을 맺어가는 그녀의 방식이 좋았다. 


"오늘 정동진 영화제 가려고요. 가는 길에 읽을 책 사러 왔어요."


여인은 종종 책 추천을 원했다. 파란색 표지가 아름다운 <인썸니악 시티>를 골라주었다. 뛰어난 뇌신경 의학자인 올리버 색스는 성소수자였다. 그가 젊었던 시절엔 정체성을 밝히면 활동에 곤란한 점이 많았다. 35년이나 사랑 없이 지내다가 생의 끝자락에 아름다운 연인 빌 헤이스와 보냈다. <인썸니악 시티>는 빌 헤이스가 올리버와 지냈던 마지막 몇 년을 적은 책이다. 


"<존재해줘>라는 문장을 찾아봐요.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길 바라요."


올리버 색스는 흑색종을 알았다. 병이 재발하여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간호를 하던 빌 헤이스가 약과 자리끼를 챙겨주고 더 필요한 건 없냐고 물었을 때 올리버는 간단하지만 절실한 문장을 말했다. "존재해줘." 꼭 찾아보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녀는 파란 책을 들고 동쪽 바다를 향해 떠났다. 


다음 날. 청년이 자전거를 타고 등장해서는 작은 책자를 하나 건넸다. 서점주인에게 자주 책을 선물하는 재밌는 손님이었다. 


"정동진 영화제 다녀왔는데요, 20주년 됐다고 소형 책자를 만들어서 주더라고요. 에세이집인데 작가님도 한 번 보세요."


책을 던져주고 떠나는 보는데, 내 머릿속에서 두 사람이 링크되었다. 다음 날부터 그녀를 보면 그가 생각나고, 그가 찾아오면 그녀가 떠올랐다. 괜히 마음이 들떴다. 기회를 엿보던 중인데 청년이 서점에서 5분 거리로 이사를 왔다며 물었다. 


"캐나다 여행을 열흘 가는데요, 혹시 제 고양이 좀 봐주실 수 있어요?"


서울에 친구가 별로 없다고 했다. 알러지가 있어서 나는 곤란하지만 고양이 키우는 친구들이 많이 있으니 알아봐주겠다 했는데 여인이 들어왔다. 두 사람이 드디어 서점 안에 같이 있다. 혼자 두근거렸다. 여인의 이름을 부르고 물었다. 


"혹시 고양이 키워요?"

"그럼요, 두 마리나 키우는 걸요."


고양이만 서로의 집을 오고 간 것이 아니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청년은 여인과 매일 연남동을 밤산책했고 이제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둘이 손을 꼭 잡고 서점에 들른다. 


"그녀가 샴푸를 제대로 하는 법을 알려주었어요. 몇 달이나 배운 대로 따라했더니 머리 숱이 많아졌어요. 정말 고민했는데 작가님이 제 생명을 구했어요. 좋은 사람을 찾아주신 덕분이에요."

"그래? 우리 서점이 또 무엇을 해주면 좋을까? 결혼식 할 때 서점에서 할래?"

"서점은 그냥 여기 있어주면 되어요. 이젠 저희가 지켜드릴게요."


존재해달라고 그들이 말할 때 나는 알았다. 서점이 구한 것은 청년의 머리카락만도 아니고, 그들의 사랑만도 아니었다. 서점이 정말로 구해낸 것은 바로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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