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같이 작업실 낼까?"
그림 그리는 친구에게 작업실 셰어를 제안했던 것은 세금 때문이었다. 준비없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수입은 늘었는데 씀씀이는 늘지 않았다. 세금을 내든지 지출을 늘이든지 결정하라고 담당 회계사는 말했다. 친구들은 외제차를 사라고 했지만 서래 마을에서 연남동으로 이사한 뒤 차는 거의 타지 않았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 안에 필요한 모든 것이 있었다. 가장 확실하게 증빙될 지출, 작가에게는 작업실 임대료라는 말을 들었다.
"뇌출혈입니다. 사망할 수도 있고 몸에 마비가 올 수도 있습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당연히 가족이었다. 다음은 뜻밖에도 돈이었다. 죽으면 차라리 다행인데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면 가족에게 짐이 되겠다. 요양병원에 들어간다면? 간병인을 써야한다면? 내가 가진 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할테다. 약에 취해 잠들 때까지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대신 돈 걱정을 했다. 내 발로 걸어서 퇴원하던 날까지도 같은 걱정을 했다. 수술비는 얼마일까? 2인실인데 입원비가 무척 나오겠지?
멀쩡히 살아난 것을 보고 의사들조차 기적이라 말했다. 이제부터의 인생은 보너스니 맘껏 즐기며 살라고 하였지만 일상으로 돌아오는 동안 굳게 결심한 것은 뜻밖에도 절약이었다. 돈의 의미를 누워서 배웠다. 후유증이 뒤늦게 올 수도 있다. 뇌출혈은 재발율도 높다고 했다. 만에 하나 다시 쓰러지더라도 모아둔 돈이 있으면 가족에게 덜 미안할 듯했다. 10만원을 쓰듯 1만원을 썼다. 아끼는 일은 금세 몸에 배었다. 체력이 회복된 뒤에도 씀씀이는 커지지 않았는데 출판사에서 메일이 왔다.
[퇴근길에 라디오 방송을 들었어요. DJ가 에세이를 읽는데 모아서 책으로 내야겠다 싶었습니다. 저희와 같이 해주지 않으시겠어요?]
의사는 서둘러 업무에 복귀하길 권했다. 뇌를 써야 회복이 빨라진다고 했다. 앉아있기도 힘든 상태에서 원고를 썼다. 적당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모니터 앞에서 울기 일쑤였다. 눈물이 뚝뚝 떨어지다가 소리내어 흐느끼다가 머리가 아파서 이제는 맘대로 울지도 못하는구나 억울했다. 점점 작아지다가 사라질 존재처럼 느껴졌다. 세상은 곧 나를 잊을 것이다. 새로 시작된 두번째 인생이 전혀 고맙지 않았는데. 있었다. 내가 쓴 글을 들어주는 사람. 라디오 너머 마이크 너머 DJ 뒤에 있는 나를 찾아내준 사람.
고마운 마음에 계약서에 사인했다. 라디오 원고 모음이라니 어렵지 않을 줄 알았는데 매일 울며 글을 썼다. 겨울 옷을 입고 시작했는데 8월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마감을 하고 나니 다음 날, 페르세우스 유성우가 떨어진다고 했다. 임진각 평화누리 공원에 누워 밤새 별똥별을 보았다. 새벽 3시. 동쪽 하늘이 희뿌옇게 밝아올 때 옆에 누워 있던 친구가 물었다.
"소원 빌었어요?"
때마침 별이 떨어졌다.
"3만!"
내 입에서 나온 말에 내가 가장 놀랐다. 책 쓰는 내내 바란 것은 딱 하나였다. 사라진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다.세상에게, 가족에게,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내가 여전히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는데. 왜 3만이라는 숫자가 입에서 나온 걸까?
"뭘 외친 거예요?"
"새 책 판매부수"
"몰라서 물어보는 건데 3만이면 많은 건가?"
"그럼. 지금까지 내 책은 5천부 이상 팔린 게 없었는 걸."
"결혼은 안 빌어요?"
"별이 하나 더 떨어지면 사랑을 달라고 빌어야지."
여름밤은 짧았다. 동이 틀 때까지 꼬박 기다렸지만 두번째 소원은 빌지 못했다. 9월말 책이 나왔다. 책이 나오던 날 교보문고 주차장을 잊지 못한다.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는데 머리가 길고 발걸음이 사뿐한 여인이 내 책을 품에 안고 지나갔다. 에세이 신간코너로 가보니 여러 사람이 내 책을 손에 들고 읽고 있었다. 계산대에 섰는데 바로 앞에 선 사람이 내 책을 계산했다. 에세이 2위. 전체 6위. 그해 12월 말까지 석달 간 정확히 3만권이 팔렸다. 내가 만난 두번째 기적이었다.
매달 통장에 큰 돈이 들어왔지만 쓰는 법을 잊은 뒤였다.
"세금으로 다 쓸 생각이에요? 작업실이라도 얻어요!"
그림을 배우러 갔는데 회계사의 말이 생각나서 그림 선생인 친구에게 물었다.
"우리 같이 작업실 낼래?"
세번째 기적을 부르는 말일 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