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점 리스본 Sep 05. 2021

우정편지1] 마롱이 물속깊이에게 보내는 첫번째 편지

- 잘은 불가능해도 성실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물속깊이님. 오늘은 하늘이 바다처럼 보입니다. 연파랑 하늘이 언젠가 제주 함덕 바다색 닮아서요. 바다를 생각하며 쓰는 편지라니 왠지 잘 써질 것 같지만, 실은 잘 쓰고 싶은 바람이 가득해요. 물속깊이님에게 편지를 쓰려니까 생각이 많아졌어요. 무슨 이야기로 시작할까, 괜히 먼저 쓴다고 했나, 첫 편지니까 명랑한 게 좋을까 하다가 일단 쓰자, 했어요. 망설이다가 추석이 올 것 같아서요. 


어제는 책모임이 있는 날이었어요. 마침 책은 이슬아와 남궁인 작가가 편지를 주고받은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 였어요. 30대부터 60대까지 남자 넷, 여자 여섯의 책 이야기는 무척 좋다와 완전 별로다 까지 차이가 컸어요. 차이가 있다는 건, 취향이 다르다는 뜻. 저는 모두를 만족시키는 책은 없지만, 편지 에세이는 여느 책보다는 부담이 적어 누구나 읽기 쉬운 만큼 호불호가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올해 읽은 에세이 중에는 편지 책이 두 권 더 있어요. <채링크로스 84번지>(헬렌 한프)와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미야노 마키코. 이소노 마호). <채링크로스 84번지>를 먼저 읽었는데, 뉴욕 사는 작가 헬렌이 런던 마크스 서점 직원 프랭크에게 책 주문하는 편지로 시작해요. 둘은 차차 친해지지만,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위트 있는 헬렌과 젠틀한 프랭크는 잘 어울려요. 1949년부터 20년 동안 왕래한 편지는 문화, 경제, 국제 정세 등도 보여 주었어요. <일곱 해의 마지막>(김연수)에서도 기행이 벨라에게서 온 편지에 붙은 ‘스푸트니크 2호 우표’로 평양 밖 세상을 알잖아요. 우리야 우표를 사용할 일이 없지만, 편지에도 보이지 않는 손이 있는 것은 분명해요. 


리스본 서점님이 추천하신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에 기대가 컸던 것은 헬렌과 프랭크도 한몫했어요. ‘죽음을 앞둔 철학자가 의료인류학자와 나눈 말들’이라는 부제도 솔깃했지만요. 긴 편지였는데 잘 읽혔어요. 더불어 제 나이에 필요한 질병, 죽음, 행운 등 사유를 주었답니다. 철학자가 쓴 편지 생각하다가 ‘철학자 김진영의 애도 일기’ <아침의 피아노>가 생각났어요. 얼른 찾았어요. 파랑색 책등에 흰색으로 제목과 부제가 쓰여 있는 책은 책장에서도 눈에 잘 띄거든요. 포스트잇을 붙여 놓은 글은 234개 글 중에 81번째. “한동안 눈뜨면 하루가 아득했다. 텅 빈 시간의 안개가 눈앞을 가리고 그 안개의 하루를 건너갈 일이 막막했다. 그러나 오늘은 아침에 눈떠서 문득 중얼거린다. 안개를 통과하는 길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그건 일상이다. 일상을 지켜야 한다. 일상이 길이다.” 책 속에는 반쯤 사용한 포스트잇도 있었어요. 몇 달 전, 어디 있나 찾다가 에이 모르겠다 하고 다시 샀는데, 계속 찾지 않기를 잘했네요. 다시 살 때는 가끔 어디에다 두었는지 생각이 잘 안 나서 2개를 샀어요. 모두 좋은 글에서 ‘일상이 길이다’를 기억하고 싶었던 이유는 코로나가 큰 역할을 했을 거예요. 


편안한 사람이 있을까 싶을 만큼 어려운 시절이에요. 저도 그렇고 물속깊이님도 그렇지 않을까 조심스레 짐작해 보아요. 이런 시기에 편지 쓸 때는 무엇을 염려해야 할까요? ‘일상을 지키라’는 김영민 글로 답하려고요. ‘안개를 통과하는 길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고 하고 어차피 다른 일을 할 수도 없잖아요. 우리 편지가 각자의 일상에 웃음 한 번, 생각 하나, 기다림 한 스푼 정도 됐으면 좋겠어요. 편지 읽다가 산책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면 더욱 기쁘고요. 이만큼 쓰다 보니 편지를 잘 쓰고 싶다는 바람은 ‘성실하게 써야지’로 바뀌었어요. 잘은 불가능해도 성실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하늘이 그새 파랑으로 바뀌었어요. 흰 구름도 생겼답니다. 조금 더 파랗게 변하면 제주 협재 바다 같을까요. 백로가 며칠 안 남았네요. 물속깊이님이 전해줄 백로 이야기도 궁금해요. 노을이 아름다울 것 같은 오늘, 편안하세요. 저도 잘 지낼게요. 2021년 9월 4일. 마롱 드림 ◑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