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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점 리스본 Sep 06. 2021

우정편지] 마롱님께 물속깊이가

- 물속깊이의 첫번째 편지

마롱님께


마롱님, 안녕하세요. 물속깊이입니다. 편지 잘 받았습니다. 얼마 만에 받아보는 편지인지 두근거려 혼났어요. 노을 앞에서 편지를 읽었습니다. 물들 듯 물들지 않다가 금세 물들어버리는 하늘을 구경하던 참이었지요. 끝인사에 적어주신 “노을이 아름다울 것 같은 오늘”에 빙그레 웃었어요. 그날 해지는 풍경이 그토록 예뻤던 건 모두 마롱님 덕이었네요.


우정편지 얘기를 들었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내가 할 수 있을까, 였어요. 무슨 일이든 뒷걸음질부터 치는 고약한 버릇이 있거든요. 흠칫, 한 발을 뒤로 쭉 뺐는데 이상하게 나머지 한 발은 움직이지 않았어요.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며칠을 보냈습니다. 겁부터 내고 최악을 먼저 생각하느라 시작도 전에 지쳐버렸던 날들이 별수 없이 떠올랐고요. 사실, 마음에 오래 남는 건 그 한 발짝이라는 걸 요즘에야 깨닫고 있었거든요. 걷다가 문득, 지는 해에 눈을 주다 슬그머니, 작달비 소리에 눈이 휘둥그레지듯 그렇게요. 도망가려는 한쪽 발을 끌어당겼습니다. 혼자가 아니라 마롱님 곁임을 생각했어요. 매일 글쓰기 줌모임에서 하셨던, 복권에 당첨되려면 복권을 사야 한다는 말씀도 떠올렸고요. 마롱님과의 편지가 제게는 어떤 시작이라고 감히 말씀드려도 될까요. 고맙습니다. 보이지 않는 우표는 이미 보내주셨어요.


낮에 산책을 하다 처서 지난 매미 소리를 들었어요. 매미가 우는 나무 아래 앉아 <날마다 만우절>(윤성희)을 다시 읽었습니다. 밑줄 그었던 “그렇게 애를 써서 나는 그냥 어른이 되었다”에서 멈췄는데, 이유는 전과 달랐어요. 편지에 전해주신 “일상을 지켜야 한다”는 문장이 떠올랐거든요. 그렇게 애를 써서 그냥 어른이 되었다는 문장이 일상을 지키라는 마음과 만나자 더는 쓸쓸하지 않았어요. 책을 덮고 고개를 들었습니다. 언제 모였는지 구름이 한가득이었어요. 가만히 떠 있는 것 같아도 사실 구름은 흘러가고 있지요. 저마다의 속도로요. 한참을 바라봤습니다. 마롱님도 어딘가에서 보셨겠지요.


백로가 하루 남았네요. 흰 이슬이 맺히는 가을밤을 생각하니 자꾸 밤 산책이 하고 싶어집니다. 백로와 추분 사이, 좋을 것이 분명할 이 계절에 우린 또 얼마나 걷고 읽고 쓰게 될까요. 어디를, 무엇을, 왜를 잠깐 접어 두고 ‘그냥’이라는 부사를 붙여 봅니다. 그냥 걷고 읽고 쓰는 가을이었으면 좋겠어요. 종종 멈춰 하늘을 보고, 달라진 바람의 기척을 알아채고, 사이사이 생각난 듯 안부를 묻고요. 제가 지키고 싶은 일상은 다름 아닌 여기에 있음을 답장을 쓰며 깨닫습니다. 이렇게 또 배웁니다. 2년 전 오늘 김연수 작가님 책에 사인을 받았는데요. 이렇게 덧붙여주셨어요. “가을다운 가을을!” 올가을은 더, 근사할 예정입니다.


2021년 9월 6일, 물속깊이 드립니다



덧) 마롱, 기분 좋아지는 이름입니다. 책상 위 도토리 옆에 두셨다던 그 녀석일까 혼자 상상하며 웃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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