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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점 리스본 Sep 23. 2021

우정편지] 마롱이 물속깊이에게 보내는 두번째 편지

- 2021. 9. 9


마롱입니다. 편지 여러 번 읽었어요. 친구에게도 바로 연락했어요. 어때 우리 어울리는 것 같아, 라고 묻기도 했습니다. 그는 물속깊이님 글이 내공 있고 편안하고 솔직하고 자연스럽다고 칭찬했어요. 기분이 좋았습니다. 제게는 발전한다고 노력하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곱게 늙어 간다면서, 곱게 늙는 게 가장 바라는 일 아니냐고 했어요. 


2019년 초겨울, 제 안에는 색깔도 분명하지 않은 실뭉치 몇 개가 뒤죽박죽 있었어요. 실은 엉켜 있는데 풀 재간이 없어서 글쓰기를 시작했어요. 어떤 색실이고 상태인지, 이유가 뭔지 알고 싶었어요. 글을 잘 쓰고 싶다거나 글로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글이 쌓이자 실의 색깔과 모습이 보였고, 글쓰기는 재미있었어요. 글의 앞뒤를 살피고 낱말을 찾고 이야기가 형태를 갖추는 일은 신기했고, 글 쓸 때 수영처럼 글만 생각하는 일도 좋았어요. 그러다가 작년 가을에 물속깊이님을 만났지요. 물속깊이님 글은 처음부터 편안하고 자연스러웠어요. 마음을 살짝 건드리는데, 그게 오래갔어요. 글쓰기 엄청나게 잘하는 사람이 왔네, 좋다, 했어요.


우정편지는 냉큼 한다고 했어요. 머뭇거리지 않은 이유는 뾰족한 수가 있거나 자신이 있어서는 아니었어요. 망설이면 생각이 많아지고, 생각이 많은 게 결정에 도움 되지 않을 때가 많아서요. 일을 누군가에게 맡길 때는 가능성을 볼 테니 서점님과 물속깊이님을 믿었어요. 날마다 브런치에 올라오는 수많은 글 중에서 우정편지에 관심 있는 사람은 얼마 없을 거라는 생각도 한몫했습니다.  


맞아요. 마롱은 도토리 옆 그 녀석입니다. 기분 좋아지는 이름이라니 한 번 더 마롱을 쳐다봤어요. 이름 궁리하면서 책상 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눈에 띄길래 소리 내어 불렀더니 명랑한 느낌이 좋았어요. 김환기 화가 책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에 녀석 이야기가 나와요. 화가는 봄을 일찍부터 기다렸나 봐요. 1960년 1월에 썼는데, 제목이 ‘봄이 오고 있는데’입니다. ‘파리에서 가지고 온 거라곤 마로니에 열매 그러니까 마롱뿐이라 친구들에게 주었더니, 우스꽝스러운 선물에도 친구들은 좋아했다. 그런데 봄이 오고 있는데 친구들은 정원이 없다’는 내용입니다. 제게 마롱은 파리 뤽상부르 공원과 김환기와 김향안 부부의 그림과 열정을 상징하니, 힘이 나는 이름입니다.  


9월 되어서는 김연수 작가님 듣는 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에서 ‘작가의 말’을 잠자리에서 듣곤 해요. 기다리는 문장이 있어요. “언제부터인가 나는 현실에서 실현되지 못한 일들은 소설이 된다고 믿고 있었다. 소망했으나 이뤄지지 않은 일들, 마지막 순간에 차마 선택하지 못한 일들, 밤이면 두고두고 생각나는 일들은 모두 이야기가 되고 소설이 된다.”입니다. ‘두고두고 생각나는 일’에 마음에 쓰이다니 실뭉치가 남았나 봐요. 하지만, 이번에는 저도 ‘그냥’을 쓰겠습니다. 물속깊이님처럼 ‘그냥 걷고 읽고 쓰는 가을’을 지내보려고요. “가을다운 가을을!” 외치는데, 여름 친구 선풍기가 쳐다봐요. 풀벌레 소리는 큰데 말이에요. 계절이 바뀌듯, 저는 서서히 근사해지겠습니다. 


어제는 저녁 설거지를 끝내고 공원에 갔어요. 물이 많아진 옹달샘에는 민트 구피가 저녁을 먹는지 친구랑 노는지 무척 바빴어요. 별이 하나둘 보여서 별자리 이름이나 알려고 별자리 앱을 켰더니 목성과 토성이 두둥실. 목성은 노랑과 갈색 줄무늬 츄파춥스 같고, 토성의 연미색 고리는 여전히 우아했어요. 나지막이 들리는 풀벌레 소리까지, 마음껏 호강했습니다. 두 팔을 흔들며 집에 오면서 편지에 써야겠네, 했어요. 이제는 즐거운 마음으로 편지를 기다리겠습니다. 2021년 9월 9일. 마롱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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