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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점 리스본 Sep 23. 2021

우정편지] 마롱님께 물속깊이가 보내는 두번째 편지

- 2021. 9. 18

마롱님께


마롱님, 하고 부르면 씨익 웃음이 나요. 명랑해라, 생각했는데 비슷한 이유로 이름을 정하셨다는 편지를 읽고 또 웃었어요. 편지 받자마자 여러 번 읽어 놓고 답장이 늦었습니다. 계절을 타느라 그랬어요(라고 하고 싶지만 며칠 좀 골골댔어요). 몸이 왜 이런가 여기저기 살피다 마음의 문제일 수도 있겠구나 싶어 잠깐 멍했네요. 몸은 곧 마음임을 자꾸 까먹어요. 어디든 아프지 않게 잘 돌봐야겠다, 매번 하는 다짐을 또 하는 사이 가을이 이만큼 와있네요.


편지를 받고 실뭉치에게 고맙다고 인사했어요. 색깔도 분명치 않은, 그것도 여러 개였던 실뭉치 덕에 마롱님을 만났구나 싶어서요. 아직 남아 “두고두고 생각나는” 실뭉치에게도 잘 부탁한다고 전하고 싶어요. 어떤 문장으로 풀리든 끝내 좋은 글이 될 실뭉치니까요. 우리의 편지가 혹 그 시작이 될 수 있을까, 상상하면 즐겁습니다.


골골 모드를 핑계로 연차를 냈어요. 평일 오전, 공원에 한량처럼 앉아 있고 싶어서요. 제게 한량은 평생 꿈일 수밖에 없나 봅니다. 공원까지 가는 길에 걸음이 자꾸 빨라지더라고요. 약속이 있는 것도, 산책 뒤에 급한 일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억지로 억지로 걸음을 늦춰 도착한 공원 벤치에서 한 일은 하늘 바라보기, 구름 구경하기,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감탄하기였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 부러울 게 없었어요. 마음에 필요한 약은 멀리 있지 않더라고요.


아, 책도 읽었어요. 편지에 써주신 <일곱 해의 마지막>이요. 며칠 전 청주에서 있었던 김연수 작가님 강연에서 독자들과 얘기 나눴던 소설이기도 하지요. 마롱님도 강연 보셨지요? 소설가가 되는 것은 쉽지 않지만 ‘쓰는 사람’이 되는 건 어렵지 않다는 작가님 말씀에 마음이 반짝 떠졌던 날이었어요. 실뭉치를 풀어내 매일 쓰는 사람, 마롱님 생각도 했어요. 편지를 쓰면서 어쩌면 마롱님은 이 비밀을 진작에 알고 계셨겠구나 깨닫습니다.


책장을 펼쳤는데 문장 위로 나뭇잎 그림자가 어른거렸어요. 어찌나 아름답던지 마음을 홀랑 내줬어요. 얼른 핸드폰 메모장을 켰습니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 그림자가 반짝인다, 고 썼어요. 잘 쓰든 못 쓰든 이렇게 쓰는 사람이 되어가는구나 싶어 마음이 좋았어요. 오늘은 이래저래 마음 볼 낯이 생기는 날인가 봅니다.


반짝이는 그림자도 챙겨야 하고, 끝 간 데 없이 높아진 하늘과 눈맞춤도 해야 하고, 달라진 바람결도 놓칠 수 없으니 마음이 바빠집니다. 올가을에도 한량 되기는 힘들겠어요. 곧 그득 찰 달님께 소원도 빌어야 하고요. 오늘 밤에도 달이 밝았는데, 마롱님도 보셨을까요?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는 대신 저는 편지를 쓰기로 합니다. 이렇게 또 쓰는 사람이 되네요. 제법 마음에 듭니다. 곧, 또 편지 쓸게요. 근사한 추석 보내세요, 마롱님. 


2021년 9월 18일, 물속깊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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