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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점 리스본 Oct 25. 2021

우정편지] 마롱에게 물속깊이

- 다섯번째 편지 2021.10.23 : 부끄러움은 서리가 덮어주겠지요.


가을이 영, 가버리려는 걸까요. 며칠 사이 확연히 달라진 공기도 그렇지만 출근길 지하철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가을을 얼른 보내려는 것 같아요. 계절에 따라, 날씨에 맞게 옷을 챙겨입는 사람들을 보며 팬데믹 속에서도 모두들 씩씩하게 버티고 있구나 문득 생각했습니다. 마롱님도 두툼한 외투 꺼내셨나요. 산책길에는 특히 목이 따뜻해야 하는데요(저는 잔소리쟁이입니다). 알아서 잘 하시리라 믿습니다만.


지난 편지에 김연수 작가님 이야기가 있어 얼른 답장을 써야지 했는데 시간이 또 훌쩍 지나버렸네요. 요 며칠은 정신이 쏙 빠질 정도였어요. 시간 도둑은 바로 백신입니다. 1차 접종 때도 꽤 고생을 했었는데요. 2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태어나 그리 심한 오한은 처음이었어요. 잘근잘근 밟힌 것 같은 근육통엔 마음 줄 짬도 없이 고열과 오한에 시달렸네요. 1인 가구에게 백신의 밤은 무척이나 고통스럽고 그래서 더 길었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이렇게 편지를 쓸 만큼 기운을 차렸어요. 달님에게 받은 3일 병가로 마롱님 컨디션은 괜찮아지셨나요? 코로나며, 백신이며 어느 하나 예상치 못했던 녀석들인데 일상에 너무 큰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네요. 이 생각을 하면 마음이 급격히 어두워지니 편지에 써주셨던 김연수 작가님 말씀을 떠올리기로 합니다. 좋은 점도 있겠지, 하고요. 백신 접종으로 저는 타이레놀과 타이레놀 이알의 적절한 쓰임을 배웠습니다. 또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 오한이 지나간 다음 날 좁은 방을 채우던 자판 소리를 떠올렸어요. 이런 상황에서도 뭔가를 쓰려고 했던 저를 만난 건 분명 좋은 일일 테니까요.


서울국제작가축제에서 김연수 작가님이 하셨던 말씀에 자연스레 2019년의 가을밤이 떠올랐습니다. 작은 동네서점에서 있었던 낭독회였고 <시절일기>가 출간된 지 석 달이 지난 시월이었습니다. 적당히 밝고 적당히 어두웠던 작은 서점에서 작가님은 말씀하셨어요. 빛인지 어둠인지 모를 때 우리는 빛을 선택할 수 있다고, 어둠이지만 끝에는 그래도 뭔가 좋은 생각을 할 수 있다고, 우리는 선택할 자유가 있다고. 그 말들을 품고 가까스로 한 시절을 건너왔습니다. 김연수 작가님에 대해 쓸 때 꼭 ‘사모해마지않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건 그런 의미에서 200% 진심입니다. 마롱님도 작가님을 ‘사모하기로 딱 정했’다 하셨으니 웰컴 투 김연수 월드! 출구는 아마 없을 겁니다.


사모해마지않는 김연수 작가님이 <설국>을 좋아하신다는 말씀에 저도 당장 읽어야지 했었어요.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로 시작하는 첫 문장만 읽은 지 몇 년째였거든요. 호기롭던 다짐과 달리 먼저 읽은 건 황정은 작가님의 <일기>였습니다. 연재하실 때 조금 읽기는 했었지만 아무래도 화면으로 읽는 건 성에 차지 않아 단행본으로 묶여 나오기를 기다렸거든요. 타이레놀을 먹어도 38도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 열 속에서 초록빛 <일기>를 읽었습니다. 책장이 쉬이 넘어가지는 않았어요. 아니, 쉽게 넘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문장을 따라가다 숨을 고르고, 귀퉁이를 접고, 생각난 듯 열을 재고, 다시 몇 문장을 읽고. 어쩌면 미열일 수밖에 없었겠다는 생각이 이제야 듭니다. 이런 문장을 만났으니까요.


“어른이 된다는 건 무언가에 과정이 있다는 걸 알아가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도 늘어간다. 용서하지 못할 사람과 차마 용서를 청하지 못할 사람이 늘어가는 일이기도 한데 그건 내가 살아 있어서. 그리고 나는 그게 괜찮다.”(황정은, <일기>, 164쪽)


‘작가, 마주 보다’에서 김연수 작가님은 조심스럽게 ‘용서’에 대해 말씀하셨죠. 시간을 두고 만난 두 용서를 생각합니다.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청춘의 문장들>, <밤은 노래한다>, <시절일기>를 선물하곤 했었어요. 여기에 한 권이 더해질 것 같네요. 한 손에 쏙 들어와 가슴으로 쑥 들어오는 이 책을 많은 사람들이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아, 후반부에 서점 리스본의 비밀책이 나오기도 하지요. 괜히 반가웠어요. 각각의 우리는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구나, 뜬금없는 생각도 해봅니다. 새삼스러울 건 없지만, 새삼스레 다행입니다.


편지를 쓰다 보니 밤이 깊었어요. 밤에 쓴 편지는 보내는 게 아니라 하지만 이번 편지는 눈 딱 감고 그냥 보내겠습니다. 오늘은 상강霜降이니까요. 부끄러움은 서리가 덮어주겠지요. 하루씩 가을에서 멀어지면 겨울은 그만큼 가까워질 테니 이것 또한 좋습니다. 찬 서리에 짙어질 단풍도요. 좋은 쪽을 본다는 건 생각보다 더 근사한 일인가 봅니다.


2021년 10월 23일, 물속깊이 드려요


덧) 드디어 11월 달력에 적을 생일이 생겨서 기뻐요. 11월에는 선물처럼 초록 신호등이 켜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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