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섯번째 편지 : 2021년 10월 27일.
가을이 아직 안 갔어요, 물속깊이님. 은행나무 잎들이 유자차 색깔이에요. 백신 2차 맞고 호되게 고생하셨다는 글에 아이고, 어쩌나 했어요. 지금은 한결 좋아졌을 것이라고 긍정적인 생각을 해봅니다.
저는 어제저녁에 가지밥을 해서 먹었어요. 눌은밥까지 고소하니 맛있네요. 눈치챘겠지만, tvn 예능 ‘슬기로운 산촌생활’ 후유증입니다. 익숙한 이야기라 안 보려다가 재미있다는 소문에 봤는데, 소문대로였어요. 드라마 촬영하면서 친해졌을 배우들이 서로 배려하고 장난치고 밥해 먹는 일에 눈을 떼지 못하는 이유는 나도 저렇게 좋은 사람들과 놀고 싶다는, 부러움 때문이라고 짐작했어요. 그들이 일하는 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함께 해서 더욱 반짝이는 사람들 모습에 서점 리스본 글쓰기 클럽 문우님들도 생각났지요. 어떤 글에도 찰떡같은 댓글을 달아주시잖아요. 그 바람에 저는 지치지 않고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친구가 있다는 것은, 동료가 있다는 것은 어쩌면 있는 줄도 몰랐던 날개가 펴지는 순간일 수도요. 배우 정경호 덕분에 여러 번 웃다가 출연하는 사람만 다를 뿐 산촌생활, 삼시세끼는 구성이나 전개가 같은데 여전히 재미있는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이유를 알면 글 쓰는 데 도움 될까 해서요.
제 궁금증은 잠시 묵혀두고 친구 이야기를 더 하고 싶습니다.
지난주에는 그림반 전시회가 있었어요. 이번이 다섯 번째였는데 첫 전시 때는 동네방네 소문을 냈지만, 네 번째부터는 카톡 프사 사진에 전시 포스터를 올려두고 있어요. 소극적 초대라고 할까요. 그걸 보고 전시장에 오거나 꽃을 보내주는 친구가 있어요. 누가 진짜 친구인가 테스트하는 시간은 아닙니다. 그저 좋아서 드리는 말씀이지요. 전시장에서 제 그림을 오래 보는 친구 모습은 문우님 댓글 같고, 애썼다는 말 대신 그림에 자기 이야기를 얹는 친구 말에는 역시 내 친구네 한답니다. 전시는 이상해요. 전시 전에는 제 그림이었는데 이후에는 제 그림이면서 여럿의 이야기가 담긴 또 다른 그림이 되거든요. 이것도 글쓰기 클럽과 같네요. 제 글이지만, 문우님이 읽어줄 때면 결이 다른 글이 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그림 그리기 시작했을 때, 글쓰기 시작했을 때는 상상도 못 한 일입니다. 저는, 운이 무척 좋은가 봐요.
이번 친구 이야기는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제 친구 중에 물속깊이님 팬이 되겠다고 나선 친구가 있다는 것을 알려드려요. 그는 제게 물속깊이님에게 꼭 전해달라고도 했어요. 축하드립니다, 물속깊이님.
<일기>는 우리 외에도 몇몇 문우님이 읽고 있어서 무척 좋습니다. 지난 편지에 <일기>에서 적어주신 글은, 제게도 생생해요. “어른이 된다는 건” 앞에 있는 글도 좋았거든요. “가수 이효리가 함께 캠핑을 떠난 동료들에게 맛있는 것을 먹이려고 고사리 파스타를 조리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고사리를 캐내 찌고 말리는 과정의 수고를 이야기하며 한 가닥도 흘리거나 낭비되지 않도록 고사리를 잘 불려 볶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어른이 된다는 건 무언가에 과정이 있다는 걸 알아가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로 이어지잖아요. 이효리 이야기가 독자를 끌어당겨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구성에 아하, 했어요. <유혹하는 글쓰기>(스티븐 킹)에서도 작가는 자기와 가족 또는 주변 이야기를 맛깔나게 풀어놓고는 슬쩍 ‘알맹이’를 알려주잖아요. 재미있는 글에서 알맹이를 만나는 것은, 산책길에 만나는 마롱과 윤슬과 노을과 억새 같답니다.
‘슬기로운 산촌생활’에서도 그림에서도 <일기>에서도 글쓰기와 연관된 생각을 하다니요. 쓰는 사람이 되고 있나 봅니다.
입동이 열흘 남짓 남았어요. 걷고 읽고 쓰는 가을을 보내고 있나 생각했더니 아주 잘하고 있다는 답이 바로 나왔어요. 제게 참 잘했어요 도장을 꾹 찍어주고 싶은 날입니다. 이번 주말에는 가을을 만끽하시기를요. 저는 하늘공원에 억새와 댑싸리를 보러 갈 생각인데, 서점 리스본 비밀책도 기다려요. 책을 기다리는 일은 언제나 좋으니까요. 2021년 10월 27일. 잔소리쟁이 물속깊이님에게 수다쟁이 마롱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