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여섯번째 편지 2021.11.07
핸드폰이 먹통이 됐어요, 마롱님. 방전된 뒤 아무리 충전을 해도 묵묵부답. 까만 액정이 그렇게 야속할 수가 없더라고요. 4년 넘게 써왔던 터라 이제 끝이구나 싶었죠. 퇴근 무렵이라 서비스 센터에 가볼 수도 없어 하룻밤을 핸드폰 없이 보냈습니다. 불편할 줄은 알았지만 예상보다 더했어요. 금단증상이란 이런 것이로구나 실감했습니다. 가장 걱정은 사진이었어요. 다섯 해에 가까운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있으니까요. 백업이 중요한 거야 잘 알지만 아는 걸 다 실천하고 살 수 있다면 번뇌도 없는 것 아니겠냐며 미루고 미뤘던 사람. 네, 바로 접니다.
고백하자면, 핸드폰이 고장 나서 반가웠던 점도 있었습니다. 짐작하셨겠지만 글감이 되어주겠구나 싶어서였지요. 별안간에 멈춘 핸드폰이 제게 어떤 신호를 보내는 건 아닐까 생각하니 조금 두근거리기도 했습니다(물론 아주 잠깐이었지만요). 예전 같으면 짜증만 내거나 스스로를 탓하기만 했을 텐데, 달라진 저를 발견하는 기쁨도 있었습니다. 보나마나 글쓰기 덕분이겠지요.
편지에 써주신 친구분 이야기에는 두 눈이 끔벅끔벅했어요. 어리둥절하면서도 역시, 기뻤습니다. 부끄러움도 컸어요. 시간을 내어 편지를 읽어 주는 마음이 귀하다는 걸 잘 아니까요. 무엇보다 마롱님이 함께 기뻐해 주셔서 웃었습니다. 누군가의 좋은 일에 같은 마음으로 축하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요. 마롱님의 친구분께도, 마롱님께도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사라질 뻔했던 4년의 시간은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아무리 눌러도 꿈쩍 않던 액정이었는데 서비스 기사님 손길 몇 번에 반짝 빛을 내더군요. 야호, 속으로 외치고 뛸 듯이 밖으로 나왔습니다. 오던 길에 즐비하던 은행나무를 어서 찍고 싶었거든요. 백업부터 하라는 기사님 말씀은 멀고 떨어지는 은행잎은 가깝습니다. 4년치 가을에 올가을이 빠질 수는 없으니까요. 사람 마음이 이렇게 간사합니다.
오늘은 일찌감치 집을 나섰습니다. 가는 가을이 아까워서요. 풍년인 바람 덕에 어제까지 자욱하던 미세먼지가 걷히고 있었어요. 마음껏 부는 바람 소리는 파도 소리 같기도 빗소리 같기도 합니다. 벤치에 앉으니 바닥의 그림자가 곱습니다. 바람 따라 낙엽이 뒤척이고 나뭇잎 그림자가 흔들리는데 자전거길 표시는 가만합니다. 그 위에 살짝 걸쳐진 제 그림자도 심심해 보이네요. 브이를 그려줬어요. 그림자가 단번에 명랑해집니다.
가을을 잘 배웅했으니 이제 반갑게 겨울을 마중하려 합니다. 입동이니까요. 입춘과 입하와 입추를 지나 입동까지. 계절의 길목마다 굳이 표시를 해두는 건 준비이자 기대가 아닐까요. 저마다의 계절을 그런대로 잘 지나왔다고, 지금에서야 생각합니다. 걷고 읽고 쓰는 사이에 저절로 그리 되었다는 걸 조금씩 알아갑니다. 옛사람들은 입동에 여러 방식으로 점을 쳤다고 하죠. 그렇다면 저는 방금 그림자 점을 쳐본 셈이네요. 명랑한 그림자를 보니 겨울로 잘 들어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몇 번의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 겨울 앞이네요, 라고 쓸 수 있어 좋습니다. 다가올 겨울도 잘 부탁드려요.
2021년 입동, 물속깊이 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