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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점 리스본 Jan 06. 2022

우정편지] 마롱이 물속깊이에게

열한 번째 편지 _ 2022년 1월 5일 


물속깊이님, 새해 떡국은 맛있게 드셨나요. 지난 일요일에는 도둑눈이 내려 그나마 새해 기분이 났습니다. 이른 아침, 눈 치우러 나갈까 말까 망설이며 주방 창문으로 내다보니 건너편 이 층 주택 앞에 빗자루를 든 할아버지가 있었어요. 아직 어둑할 때라 일찍 나오셨네 했는데, 좌우를 두리번거릴 뿐 눈은 쓸지 않았어요. 잠시 후에 다시 보니 대문 앞에 대문 길이만큼만, 직사각형으로 쓸고 끝. 저도 낮 기온이 영상으로 오른다니 녹겠네 하고 나가지 않았답니다. 


한강은 요새 바쁘겠어요. ‘몸을 뒤척이다가’ 얼기도 해야 하고 녹기도 해야 하니까요. 


며칠 전, ‘나 홀로 집에 2’를 봤어요. 시작하자마자 깜짝 놀랐어요. ‘착각’ 때문이죠. 이제껏 30년 동안이나 영화를 봤다고 생각했어요. 아들은 제 말에, 진짜 라는 추임새를 넣고는 씩 웃으며 혹시 치매냐고 해서 등짝을 맞을 뻔했답니다. 1992년 겨울에 개봉, 두 아들은 초등학교 1학년과 돌 지나고 한 달도 되지 않은 아기였으니 영화는 꿈도 꾸지 못할 때. 남편은 주 6일 근무에 출장과 야근이 잦았으니 ‘나 홀로 육아’ 시절. 그렇다면 텔레비전에서 방영할 때는 왜, 명절이었으니 분명 시댁 주방에 있었을 겁니다. 이후에는 또, 왜, 공백기에 보지 못한 영화 챙기느라 바빴을 겁니다.  


어쨌든, 영화로 돌아가면 자주 웃다가(그것도 큰소리로), 케빈이 세상과 사람에게 등을 돌린 공원 비둘기 아줌마에게 산비둘기 인형 두 개 중에 하나를 나누어 주면서 인형을 나눠 갖고 있으면 우정이 영원할 거라고 말하는 장면은 뭉클했어요. 녀석, 참 똑똑하고 멋졌습니다. 


어제는 병원 갈 일이 있어 8시 반경에 신목동역을 지나갔어요. 헉헉, 뒤에서 들리는 누군가의 뜀박질 소리에 출근 시간을 실감했죠. 병원은 벌써 복잡해서 저녁 전 시장 같았는데, 이번에는 혈액검사 비용에 놀랐답니다. 두 아들 교육비가 끝나면 호의호식은 아니어도 여유라는 낱말과 친해질 줄 알았는데, 그 또한 착각이었나 봐요. 한숨 돌릴 만하니 병원비가 응당 자기 차례인 것처럼 나타났으니 말입니다. 


안양천에 오리 구경을 갈까 하다가 카페로 향했어요. 햇볕 쬐고 책 읽다가 실손 보험이 떠올랐고 좋은 글을 만나 병원 일은 잊었답니다. 


❝발을 길게 끌며 민박집으로 들어왔을 때 주인 할머니는 “뭐한다고 땡볕에 종일 걷기만 한 대. 어서 씻고 저녁 먹어”라고 말씀하셨고 저는 머뭇거리며 저녁 생각이 없다고 답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주인 할머니는 “저녁은 저녁밥 먹으라고 있는 거야!”라고 다시 말씀하셨고요.❞


나무 색깔 표지에 초록색 제목이 마음에 쏙 드는 <계절 산문>(박 준)에서 만난 글입니다. 제목은 저녁과 저녁밥. 제목도 좋지 않나요. 시인 글은 신문에서 몇 번, 시도 여기저기에서 몇 번 읽은 게 전부. 그러니까 시인 책은 처음인데, 짧은 글과 짧은 글보다 조금 긴 글을 쉬운 말로 써서 읽기에 좋습니다만, 여운은 깁니다. 카페에서 햇살 쨍쨍한 틈에 살며시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꿈을 꾸었습니다. 


물속깊이님은 작년에 제일 잘한 일이 글쓰기를 계속한 것과 우정편지를 시작한 일이라고 하셨는데, 저는 서점 포르투 전시와 물속깊이님과 친구 된 일을 꼽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친구에게 함께 해보자고 할 일이 생겼어요. 윤대현 선생님(정신건강의학과 교수) 글에서 읽은 것인데, 인생 최대 걱정이 치매인 환자 이야기에서 시작합니다. 그분은 치매 검사 결과가 정상이었는데도 걱정의 강도가 줄어들지 않았대요. 해서 1월에 나를 위해 어떤 즐거운 일을 할지 한 가지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라는 숙제를 드렸답니다. 저는, 무릎을 탁 치진 않았어도 나도 해야지 했어요. 일 년이면 12개나 되니 계획 세울 때부터 즐거울 것 같지 않습니까. 1월은 이미 한 것 같지만 결과를 기다려야 하는 일이니, 친구에게 ‘사울 레이터’ 전시를 보러 가자고 해야겠습니다. 물속깊이님은 어떤 일을 하고 싶나요. 


<쇄빙선>, 읽던 날의 고요도 생각나요. 덕분에 겨울 한강을 기웃거리기도 한걸요. 쇄빙선이 이미 곁에 있었을 것 같다는 말씀에 지난달 매일 글쓰기 클럽 숙제로 읽은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최승자) 글이 생각납니다. “내가 속한 사회, 내 주위의 상황과 인물들이 달라지면 내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 나의 내부와 내면이 달라져야 내가 달라지고, 그 달라진 눈으로 바라볼 때 내가 보는 세계가 달라진다는 거였지.” 그러니, 새해 마법도 좋고 물속깊이님 변화도 좋습니다. 저는, 물속깊이님이 좋으면 그게 무엇이든 좋아요, 시무룩하게 있지 마세요. 


수다가 길었습니다. 오늘 저녁 반찬은 삼겹살과 봄동 겉절이. ‘소한’이잖아요. 든든하게 먹어야죠. “저녁은 저녁밥 먹으라고 있는” 거니까요. 봄동은 가격은 착하고 색깔도 예쁘고 맛도 좋아요. 문득, 봄동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따뜻하게 지내다 함박웃음 지을 일이 여러 번 생기기를요. 2022년 해오름달 5일. 마롱 드림 ♣



* 물속깊이님, 마법 카푸치노 기다릴게요.

** 케빈 역 맥켈리 컬킨은 ‘쿠건 법’으로 부모로부터 재산을 지킬 수 있었답니다. 

*** 쿠건 법(1939)은 1921년 찰리 채플린 영화에 출연했던 아역 배우 재키 쿠건이 자신이 번 돈을 어머니가 모두 탕진하자 법정 소송을 벌였고, 법원은 아역 연예인 재산을 부모가 마음대로 쓸 수 없도록 하는 법을 만들었대요. 























해오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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