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보고 인정하기
“이 책 너가 읽고 있는 거니? 초등학교 6학년이 읽기에 '죄와 벌'은 너무 무거운 책이다.
너 나이에 맞는 책을 읽는 것도 중요해“
몇 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방문 피아노 선생님이 하셨던 이 말이 머릿속에 남아 있다.
그래, 그 때 나는 초등학생이었지.
책 읽는 것이 좋아서 언제나 책을 읽었고, 이따금 가슴 가득 차오르는 풍성한 느낌,
그런 느낌을 가지고 글을 쓸 때면 언제나 긴 글을 단숨에 써 내려갈 수 있었던 신기한 경험.
그 때 나는 내가 읽고 있는 책의 수준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런 잣대 자체가 나에겐 없었다.
그저 읽고 싶어 읽을 뿐 두꺼운 책, 얇은 책, 소설책, 시집, 교과서에 나오는 책, 아닌 책 등등의 조건이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잘 못 읽고 있는건가?
그런데 피아노 선생님의 말을 듣는 순간 이런 생각이 다소 충격적으로 내 마음 속에 훅 들어왔다.
’나는 어려운 책을 읽는 아이인가 보다‘
뿌듯한 마음도 아니고 우쭐대는 마음도 아니었다.
나에 대한 뭔가 '바람직하지 못한' 느낌이었다
'내 나이에 읽어야 할 책은 아닌가봐. 그런 책이 있나봐? 내 나이에 맞는 책은 뭘까?'
’골라 읽는 기준'이 생겨버렸다.
이 후, 나의 책 세상은 이상하게 좁아졌다.
’나한테는 너무 어려운 책인가?‘ 책을 볼 때면 저울질을 하는 습관이 생겼다.
읽고 싶으나, 내 수준에 맞지 않을 것 같은 책이란 ’느낌‘이 들면 내려놓게 되곤 했다.
책 속에서 마주하는 나
그럼에도 책은 내가 나임을 느끼게 해 주는 가장 큰 존재인 것은 여전했다.
아마도 그래서 였던 것 같다.
지난 몇 년간 책 마저도 외면하고 살았던 이유가.
책 속에 들어가면 나를 마주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말이다.
칩거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 소위 ’성공한 사람‘들은 그 시기 대부분 미친 듯 책을 읽었다고 했다. 1년에 100권, 200권 심지어 1일1독을 하며 자기를 찾아갔고, 읽은 것을 블로그에 올리며 인플루언서가 되었고, 책을 출판하여 작가가 되었고, SNS를 하면서 경제적 자유의 길이 열렸고, 그래서 책을 읽기 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고...
’죽은 듯 살지 말고 차라리 그 시간을 살아내‘
나의 칩거는 책조차 멀리할 만큼 깊은 바닥이었지만, 동굴 밖으로 겨우 한 발짝 내민 내가 이 시간을 살아내는 법은 그래도 책이었다.
그림을 시작했고, 다시 책을 손에 잡았다.
책은 ’나‘를 만나게 해 준 통로였음에 대한 과거 희미한 기억 때문일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내용을 이해하기보다는 상처받고 좌절한 나를 만나는 시간이 더 많았다.
아프고 슬펐지만 나는 상처투성이가 된 내 모습을 바라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똑바로 바라보는 용기
’똑바로 쳐다본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비둘기를 똑바로 쳐다본 적이 있는가? 나풀거리는 꽃잎같이 아름다워 보이는 나비는? 작고 귀여운 다람쥐나 토끼는?
멀리서 바라보는 비둘기는 그냥 비둘기일 뿐이었지만, 가까이서 똑바로 쳐다보노라면 불투명한 회색빛 눈, 젖은 듯 축축해 보이는 깃털, 주름지고 빨간 발가락, 오른쪽, 왼쪽으로 순식간에 돌아가는 머리.. 그것들이 클로즈업 되는 순간 왠지 두려움이 느껴진다.
심지어 강아지나 고양이도 똑바로 쳐다볼 땐 비슷한 느낌을 갖는다.
사람은 말할 것도 없다.
한 사람의 얼굴과 눈을 똑바로, 오래도록 쳐다본다는 것. 그의 장, 단점을, 인격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
나에게는 두려운 일이다.
그래서 가능한 모든 사람들과 두루두루 좋게 지낼 수 있는 적당한 선을 두고 지내는 편을 택한다.
멀리서 평화의 상징으로 비둘기를 바라보는 것처럼, 꽃잎같이 날개짓하는 나비를 예쁘게 바라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나를 그렇게만 볼 수가 없었다.
미루고 미루던 일,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가를 확인하는 일을 했다.
아니 할 수 있다면 가장 '똑바로', 가장 '오래' 나를 쳐다보려고 했다.
못난 내 모습, 가장 깊은 상처가 무엇인지 보고, 그것이 현재의 나임을 인정했다.
죄책감, 자의식,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힌 자기부정, 열등감, 이기심과 책망...
내 모습들이었다. 한없이 위축되고 딱딱한 빛 바랜 덩어리같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마냥 싫고 보기 싫을 줄만 알았는데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부끄럽고 도망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손을 내밀고 싶어졌다.
그냥 모른 척 도망가 버리기에는 상처가 컸고 부러질듯 연약했다.
나라도 손을 잡아 주어야 했다.
내 모습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인정하니, 치유할 소망도 생겼다.
그간 나를 애써 외면하며 지냈던 이유는 정말 내가 미워서일까? 부끄러워서일까?
아니면, 역설적이게도 사랑했기 때문일까?“
마음속에 품었던 혼란스런 질문.
이제는 답을 알 것 같다.
나는 나를 사랑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