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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 Sep 23. 2024

<토지> 꿀 묵고 정신차리라

童心


요즘 아이들은 어떤가요?

땅 위에 기어다니는 개미들을 오랫동안 관찰하며 놀기도 하나요?

마른 땅을 흔히 볼 수 없는 환경이기도 하지만, 놀거리도 참 다르더라구요... 동네 놀이터에서도 흙장난보다는 놀이기구에서 놀거나 키즈까페, 혹은 키즈 짐(Gym) 클럽 등에서 모여 노는 것이 일반적이죠.


저는 아직도 어린시절 동네 아파트 단지, 풀 숲이 많았던 어느 구석에서 개미를 관찰하며 시간 가는줄 모르고 놀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토지>에도 후일 이 대작의 주인공이 되는 어린 서희와 서희를 돌보는 하인인듯, 친구인듯 한 봉순이, 길상이세 아이들이 마당의  개미를 둘러싸고 서로의 입장을 주장하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오늘의 이 문장들을 읽는 순간, 저는 지금껏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 동심(童心)이 꽃처럼 확~ 피어오르는듯 했습니다.


아, 책에서 본 것처럼 개미들이 정말 한 줄로 기어 가네?  사람처럼 나뭇잎을 머리 위로 번쩍 들고 옮기고 가는 건가? 우왓, 죽은 벌레를 어디로 끌고 가는거지?  (조그많게 파여 있는 개미집을 작은 나뭇가지로 살금살금 파해져 보면서) 구멍 아래에 정말 미로같이 생긴 복잡한 개미집이 있을까?  그 방마다 개미 가족들이 살고 있을까? 가장 아래 방에는 여왕 개미랑 알들도 정말 있을까? 여왕개미를 지키는 병사 개미들은 진짜 무섭고 사나울까? ...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칠 줄을 몰랐던 상상들입니다.






토지가 품은 문장


마로니에북스. p. 331-332


"조맨한 개미 놈들이 크다만 벌을 잡아 묵을라 캅니다"
"어디, 어디!"
눈을 반짝하며 서희는 달려간다.

벌은 산 놈이었다. 날개가 상하였는지 날지 못한다.
엉금엉금 기어가는 벌한테 개미 네댓 마리가 덤벼드는 것이다. 엉덩이에 올라탄 놈, 등에 올라탄 놈, 다리를 물고 늘어진 놈.
벌이 뒹군다.
사방에 나가떨어진 내들이 미친 듯이 맴을 돌다가 그악스럽게 다시 덤벼든다.
잔인하고 무서우누 아귀들이다.

아이들은 머리를 마주대고 땅을 내려다본 채 꼼짝없이 곤충들의 격투를 지키고 있다.
"애기씨"
"..."
"요놈으 개미 새끼들을 직이부립시다"
"안 돼"
응원의 전령을 받았음인지 더 많은 개미들이 달려왔다.  디뚝디뚝 걷다가 뒹굴곤 하던 벌이 이제 뒹굴기만 한다.

"애기씨"
"..."
"요놈으 개미, 나쁜 놈이요! 직입시다"
"아냐"
"불쌍히요"
봉순이는 뒹구는 벌에게 손을 내민다.  서희는 봉순이를 떠밀었다.
뒤로 나자빠지면서 "부, 불쌍치도 않소!"

"누가 이기는지 볼테야"

"봉순아, 모하노?"
길상이 얼굴을 쑥 디밀었다.
"이기이 멋고?"
"개, 개미 놈들이 벌을 잡아묵을라 칸다. 죽지도 않았는데,"

길상의 손가락이 어느새 벌을 낚아챘다. 개미가 사방으로 흘어진다.
"머야앗!"
서희가 고함을 쳤다. 
그러나 길상은 날개가 상하고 기진맥진한 벌을 소중하게 싸들고 가서 백일홍 나무의 그 분홍 빛깔 꽃 속에다 넣어준다.

"꿀 묵고 정신 차리라"

발을 구르며 서희는 울부짖었다. 길상은 무정한 눈을 하고 울부짖는 서희를 쳐다본다. 



"엉덩이에 올라탄 놈, 등에 올라탄 놈, 다리를 물고 늘어진 놈.

벌이 뒹군다. 사방에 나가떨어진 내들이 미친 듯이 맴을 돌다가 그악스럽게 다시 덤벼든다. 응원의 전령을 받았음인지 더 많은 개미들이 달려왔다.  디뚝디뚝 걷다가 뒹굴곤 하던 벌이 이제 뒹굴기만 한다."


그래도 명색이 벌인데,  자그마한 개미떼들에게 무참히 공격당하는 생생한 문장들을 읽으니 어린 시절 개미들에게 눈을 떼지 못했던 그 시간속으로 빨려 들어가는듯 합니다.


놀이를 보면 아이들의 성향이 보인다는데, 이 또한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개미들에게 속절없이 공격당하는 벌이 불쌍하기만 한 봉순이.

개미와 벌의 생사를 건 싸움,  누가 이기는지 끝장을 보고 싶은 서희.

죽어가는 벌을 보자마자 두말없이 살려내고야 마는 길상이.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길상의 행동입니다.


상전인 서희의 앙칼진 명령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주저함없이 약한 쪽, 벌을 살려준 그의 용기와 마음씨 때문은 아닙니다.  벌을 살려낸 그의 방식 말입니다.


길상은 공격당하는 벌을 손가락으로 낚아챈 후, 그는 "날개가 상하고 기진맥진한 벌을 소중하게 싸들고 가서 백일홍 나무의 그 분홍 빛깔 꽃 속에다 넣어주었다" 했습니다.  그리고 벌에게 말해 줍니다.


 "꿀 묵고 정신 차리라"




만약 나였다면, 속에다 벌을 넣어줄 생각을 수 있었을까요?

그저 개미의 눈에 띄지 않는, 먼 곳 어딘가에 떨어뜨려 놓았을 것만 같습니다.

그럼 상처투성이의 벌은 또다른 곤충에게도 공격의 대상이 되어 결국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고, 가까스로 살아난다해도 찢겨진 날개와 몸으로 생명을 유지하기는 어려웠겠죠.  지금의 저라도 아마 그것까지는 생각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백일홍 꽃 속은 벌에게 가장 안전하며, 안락할 뿐만 아니라 생명의 에너지를 구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먼 훗날 길상은 온갖 세상의 탐욕이 개미떼처럼 서희에게 달려들 때,  벌처럼 공격당하는 서희를 지금처럼 살려낼지 모르겠습니다.  박경리 작가는 이 모습을 빗대어 미리보기 해 준 것일까요?





미리보기의 복선이라 해도 좋겠지만, 

아무튼,

<토지>가 품은 문장은 그 자체로도 감동이 됩니다.


"꿀 묵고 정신차리라"

도움이 필요한 상대에게 내가 편한 방식대로가 아니라, 상대가 정말 필요한 것으로 돕고자 하는 진정성을 붙잡게 하는 문장이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동심을 일 순간에 깨워준 섬세한 표현들,  돋보기로 바라보는 듯한 개미와 벌의 생사를 건 몸싸움, 백일홍 속에서 상처를 치유하고 새 힘을 얻었을 벌의 모습을 상상하는 즐거움에 흠쩍 빠져 행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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