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죽음보다 고생스러울지라도,
<토지>를 읽으며 나는 '윤 씨 부인'이 죽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자기 생을 마감할 것인지... 간절히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윤 씨 부인'은 <토지>의 주인공 서희의 할머니입니다.
최 씨 가문은 자손이 귀해 대를 잇는 남자들의 역할이 미흡했지만, 대신 그의 여인들은 대장부처럼 강한 면모가 있어 실제 가문을 일으키는 주축이 되었습니다.
윤 씨 부인 또한 그런 강한 안주인 중의 한 명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운명의 장난인 듯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 남편을 잃은 후, 절에서 기도하던 중 낯선 남자에게 겁탈을 당해 아이까지 낳고 마는 오욕의 삶을 살게 됩니다.
자신의 의지는 아니었다 해도 겁탈당한 여인으로서의 자괴감, 원래의 아들과 죄악의 씨앗 같은 또 다른 아들로 인해 그녀는 평생의 죄책감에 매여, 두 아들 누구에게도 '어미'임을 포기한 채 목석처럼 살아갑니다.
"치수도 자식이며 환이도 자식이다. 서로가 다 불운한 형제는 윤 씨 부인에게는 무서운 고문의 도구요, 끊지 못할 혈육이요, 가슴에 사무치게 사랑하는 아들이다. 십 년 이십 년 세월 동안 윤 씨 부인은 저울의 추였으며 어느 편에도 기울 수 없는 양켠 먼 거리에 두 아들은 존재하고 있었다...."
토지가 품은 문장
<토지> 1권, p.368 마로니에북스
'이미 공양으로 바쳐진 몸, 어찌 이다지도 세월이 기단 말이오?
내게 아직도 갚음이 남아 있단 말씀이오?'
'당신네들은 내 목숨을 내 손이 닿지 않는 나무 위에 걸어놓으셨소.
그리고 너의 죄는 너 스스로 사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들 생각하시는 거요.
아직도 나는 내가 나를 벌주어야 한단 말씀이오?'
.........
(문의원이 윤 씨 부인에게)
'부인, 부인의 죄목은 무엇이오? 부인이 죄라 생각하시기 때문에 죄가 되는 게 아니겠소?
하나 그것은 좋소이다. 다만 임의로 죽을 수 없는 게 사람의 목숨이란 말씀이오.
설령 삶이 죽음보다 고생스러울지라도 사람은 살아야 하는 게요.
제가 일개 의생으로 칠십 평생 얻은 것이라고는 사람의 목숨이 소중하다 그것이었소.
제 목숨뿐만 아니라 남은 목숨도, 죄가 있다면 사람마다 죄가 있을 것이오, 갚음이 있다면
사람마다 갚음이 있을 것이요, 살아야 할 사람이 죽는 것은 개죽음이요, 죽어야 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은 짐승일 따름, 사람은 아닐 것이외다.
우리가 '이미 죽은 목숨'이라고 표현할 때의 그런 심정일까요?
..........
저의 경우에도 비슷한 마음을 가졌던 적이 있었습니다.
자식과의 갈등을 앞에 두고, "내가 과연 엄마 자격이 있나?"라며 자책하던 시기였습니다.
윤 씨 부인이 자신을 '이미 공양으로 바쳐진 몸'으로 단언하고, 지금껏 알고 있던 자기 존재를 포기한 것과 비슷한 심정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저 또한 스스로 '엄마'의 자격을 박탈하며 그저 자식을 위한 '기도자'로서의 삶을 살 것을 다짐하곤 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쑥불쑥 '엄마의 자격지심'이 올라올 때면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보다 더 싫었던 것은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 '그래도 내가 저를 낳아준 사람인데 이 정도까지 싫은 소리도 못할까?' 싶은 억울한 마음이 든다는 사실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직도 내게 갚을 것이 남았는가?' '내가 나를 벌주어야 한단 말인가?'라는 윤 씨 부인의 독백에도 기꺼이 스스로를 벌주며 살고 있지만, 까닭 모를 원망과 억울함에 괴로워하는 마음이 엿보입니다.
"부인, 부인의 죄목은 무엇이요?
부인이 죄라 생각하시기 때문에 죄가 되는 것이 아니겠소?
설령 삶이 죽음보다 고생스러울지라도
저는 윤 씨 부인이 스스로를 가둔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이것이 제가 그녀의 죽음을 기다렸던 이유기도 합니다.
죽기 전까지 제발 스스로를 가둔 죄책감의 감옥에서 해방되기를.
죽은 듯 살지 말고, 산 듯 살아가는 윤 씨 부인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윤씨 부인이 나오는 모든 장면들에 시선을 멈추곤 했습니다.
이것은 제 자신에게 품어왔던 바램이기도 했으니까요.
그렇게 마음 속으로 윤씨 부인을 응원했지만 그녀는 결국 끝까지 그러하질 못했던것 같습니다.
첫 아들 치수는 먼저 목숨을 잃었고, 둘째 아들 환이는 끝내 다시 만나지 못한채 마을을 휩쓸었던 역병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내 마음에 죄가 있소. 내 마음은 사악하오.
이 세상에서의 갚음보다 더 큰 형벌을 받고 싶은 거요"
죽기 전까지 이 마음을 놓지 못했을 그녀는 죽어서는 자신을 용서 했을까요?
그 경중이야 어떻든 인간은 양심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누구든 죄책감을 가질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스스로가 죄라 생각하기에 죄'가 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사람은 살아야 하는 게요...'
고통이 아무리 커도, 절망스러워도, 희망이 없어도, 포기하고 싶어도...
이 말은 어느새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가?" 라는 소리로 변합니다.
그 소리의 울림이 자꾸만 커져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