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벽에 떨어진 솔씨
당신은 어떠신가요?
데미안의 싱클레어처럼 나를 둘러싼 또 다른 세계, 두 세계를 넘나드는 서로 다른 나를 느껴본 적이 있으신가요?
윤 씨 부인은 <토지>의 주인공 '서희'의 할머니입니다. 그녀에게는 숨겨진, 숨겨져야만 하는 아들 '환'이 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윤 씨 부인의 손에서 격리되었고, 산속 절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는 어느 날 찾아온 생부(生父)를 따라 동학군의 무리에 합류하며 비로소 절 밖 세상을 만나게 됩니다.
'절 안'에서만 살던 환은 생부를 쫓아 '절 밖' 세계를 경험하지만, 숨어 살듯 단절된 채 살아왔기에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지 못합니다. 박경리 작가는 이런 그의 외로운 태생을 '석벽에 떨어진 솔씨'로 비유합니다.
토지가 품은 문장
<토지> 2권, p.306, 마로니에북스
어쩌다가 바람에 날린 솔씨 하나, 석벽에 떨어져서 움이 트고 애처롭게 자란 한 그루의 소나무는 트인 곳이 없이 평풍같이 둘러싼 능선에 해가 솟고 달이 뜨며 그 해가 다시 떨어지고 달이 지는 것을 바라보며 능선 밖에 광활한 천지가 있어 그곳에서도 해와 달이 지고 뜨는 것을 모른다.
환이는 석벽에 떨어진 솔씨, 적벽에서 애처롭게 자란 한 그루 소나무 같은 소년이었다.
나서 자라면서 철 따라 달라지는 숲의 울림, 먼 속에서의 짐승 발자국, 날짐승의 나래 짓, 온갖 초목과 산꽃들이 내어 뿜는 향기, 허공에서 손짓하는 무지개 같은 그런 정(精)을 좇아 땀을 흘리고 잠이 들고 꿈을 꾸었다.
산 밖의 세상이 있어 그곳에서도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어느 여름날 절을 찾아온 사나이를 따라 숲길을 뚫고 산을 벗어나 주막에 묵으면서부터였다.
(.....)
환이 다시 깨달은 것은 평풍이 둘러쳐진 것 같은 산속과 넓은 산 밖의 세상을 비춰주는 해와 달이 같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산속은 차갑고 고요한 달의 세계요, 산 밖은 지글지글 타는 해의 세계, 하나는 환(幻)과 같이 적막한 평화, 하나는 고회의 몸을 떨어야 하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원망하지 말라. 억만 중생이 다 그렇느니라, 원망하지 아니하면 고통은 기쁨이 되느니라.'
우관 선사는 그런 말로 타이른 일이 있었다.
산 중 경사면이나 바닷가 절벽에 붙어서 아슬아슬하게 자라고 있는 소나무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저런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자랄 수가 있을까?....' 생각했었는데, 하필이면 그들의 씨앗이 그곳에 떨어졌기 때문인가 봅니다. 번듯하게 땅 위에 뿌리내린 소나무들에 비해 그들은 얼마나 살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을까요?
'어쩌다가 바람에 날린 솔씨 하나, 석벽에 떨어져서 움이 트고 애처롭게 자란 소나무...'
환이라는 인물도 그런 소나무와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갓 태어난 생명을 그저 '산 중에 아무렇게나 떨어진 씨앗'이라 해도 충분히 애처로울 것을,
'석벽에 떨어진 솔씨'라 표현한다면 얼마나 더 깊은 울림이 있는지 느끼고 싶어 여러 번을 읽어 보았습니다.
환이는 어머니 윤 씨 부인이 겁탈을 당해 낳게 된 아이입니다. 이런 이유로 태생부터 존재 자체를 거부당해야만 했던 존재... 그래서 번듯하게 뿌리내릴 땅 한 조각을 갖지 못한 채, 석벽이 나마 움켜쥐고 가까스로 살아내야만 했던 비운의 생명입니다.
이어지는 문장에는 한 인물 안에서 두 세계가 충돌하고, 그로 인해 혼란스러워하는 마음의 상태가 실감 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원해서 태어난 삶도 아닌데, 영문도 모른 채 자기의 존재감을 거부당하는 내면의 상처 또한 느껴지는 문장입니다.
"환이는 산을, 평지를 가는 사람보다 더 빠르게 탈 수 있었다. 은신의 교묘함, 추적의 냄새를 산짐승과 마찬가지로 맡을 수 있었다. 그러나 끝없이 쫓기는 몸은 숨이 가쁘다. 쫓는 자보다 더 뛰어야 하고 휴식의 틈이 없다. 그러나 그는 산을 벗어나 멀리 사람 사는 곳으로 갈 용기가 없는 것이다(p.308)."
"숙명 같은 그의 생장과 부딪쳤던 환난이 어느덧 그에게는 유랑하는 불행한 습성을 길러주기도 했으려니와 그의 핏속에는 이미 고독한, 어느 곳이든 정착할 수 없었던 것이 있었던 성싶다.
질서가 있고, 평온한 것 같은 마을은 본시부터 그의 불 붙일 곳은 아니었던 것이다. 평지에 나간다면 뭍에 오른 고기같이 산에서 익은 발은 힘을 잃을 것이며 은신의 지혜는 쓸모없이 도리 것이다(p.308)"
이런 환에게 그를 길러 주셨던 우관 스님은 이렇게 말해 줍니다.
원망하지 않으면 고통은 기쁨이 되느니라.
'원망하지 말라'는 우관 스님의 말은 그저 엄마가 잔소리 끝에 후렴구처럼 하시던 "참고 살아, 그럼 다 지나간다"라는 말처럼도 허망하게만 들립니다. 그래서 저는 이 문장에 오래도록 마음이 머물렀습니다.
'힘든데, 어떻게 원망을 안 해?'
'고통이 무슨 수로 기쁨이 될 수가 있어?'
내 고통을 적당히 넘기려는 이런 종류의 위로가 죽기보다 듣기 싫었습니다.
그런데, 벗어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다면, 이거라도 해 보자, 라는 마음이 생길 때가 있죠...
"원망하지 않으면, 고통이 기쁨이 되느니라..."
성경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로마서 5:3-4)
그러고 보니, 놀랍게도 우관 스님도, 우리 엄마도, 하나님도 결국은 비슷한 말씀을 하고 계시네요.
"원망 말고 견디면, 고통은 기쁨이 된다"
이쯤 되면, 이 말이 진짜 '진리'가 아닐까? 마음이 조금은 열립니다.
그러나 공짜는 아니죠. 조건이 있네요.
원망하지 말아라...
일단 남 탓, 환경 탓, 다른 무언가를 탓하는 마음을 거두어야 합니다. 원망은 '남 탓'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나는 억울'할 뿐, 고통이 내가 해결해야 할 과제가 되질 않습니다.
다음은, 인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 경험으로는 무작성 참는 것은 답이 아니었습니다.
억눌러만 놓을 뿐, 그것은 또 언젠가는 폭발하고 말 테니까요.
인내는 고통의 속성을 바꾸려는 '연단'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영화 <마션>의 마지막 대사가 이런 연단을 의미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주에선 뜻대로 되는 게 아무것도 없어.
어느 순간 모든 게 틀어지고, '이제 끝이구나' 하는 순간이 올 거야.
'이렇게 끝나는구나'라고 포기하고 죽을 게 아니라면, 살려고 노력해야 하지.
그게 전부다. 무작정 시작하는 거지.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고, 다음 문제를 해결하고, 그다음 문제도....
그러다 보면 살아서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영화 <마션>의 마지막 대사 중에
어떤 길을 끝까지 가 본 사람은 알 수 있습니다.
고통의 대상을 무엇이든 끝까지 참고, 견디면 마지막엔 어떤 방식으로든 '성장'이 있다는 것을요.
포기하지 않고 '연단'해온 길 끝에는 반드시 성장의 열매가 있다는 것을요.
당장보이는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고, 또 하나를 해결하고, 그렇게 인내를 되풀이하는 것.
이런 연단이 '소망'을 이루어 줍니다.
천 개 계단을, 꼭대기가 보이지 않기에 그저 포기하지 않고 올라가다 보면 어느새 정상에 올라가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정상에서 까마득한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면, 비로소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아, 힘들었지만 정상까지 왔구나'
제게는 고통이 기쁨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석벽에 떨어진 솔씨'같은 마음, 그런 삶이라 해도 바위를 뚫으며 0.1mm의 뿌리 내림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어느새 멀리서도 눈에 뜨일 만큼 우뚝 솟은 소나무로 자라 있는 것입니다.
환이의 삶, 우리의 삶도 그러하길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