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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 Dec 20. 2023

03_우리 딸은 공부를 해야지

또 하나의 렌즈

“면을 찾아봐, 콧날 옆에 면 보이니?”

 

어렸을 적 미술 선생님은 언제나 말씀하셨다. 

동그란 사과를 그릴 때도, 이미와 볼과 입술을 그릴 때도, 심지어 장미꽃, 국화꽃을 그릴 때도 을 찾아 곡선을 표현해 보라고...

 

그 때마다 나는 눈에 힘을 주고 '둥근' 물체에선 도무지 보이지 않는 '사각' 면들을 찾으려 애쓰곤 했다.


동그랗게 그려야 하는데, 왜 자꾸 반듯 반듯한 면을 찾으라는 걸까?

원과 사각형이 같이 존재할 수 있다는 거야?

선생님 말씀 잘 듣는 모범생인 덕분에 나는 그저 열심히 네모 면을 찾아 명암을 채워나갔다.

 

흰 부분 없이 모든 면이 명암으로 채워질 무렵, 나는 멀찍이 떨어져 바라본 내 사과 그림에 깜짝 놀랐다. 어느새 사과는 동그란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이런 느낌이구나...





엄마의 말


'죽은 듯 살지 말고, 차라리 살아내'


그야말로 죽지 못해 살던 나를 할머니의 눈빛이 이렇게 괴롭히던 어느날인가 싶다.    

나는 불쑥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너무나 오래전에 멈추어 버렸던 그 일이 왜 난데없이 꿈틀댔는지 모를 일이다.

 

“엄마, 저 예고 가고 싶어요. 그림그리고 싶어서”

 

엄마는 허락해 주실지도 몰라. 

공부하다가 그림을 그려도, 시험기간에 시화집을 들춰봐도 한번도 뭐라 하신 적 없잖아. 

한 쪽 벽면을 다 채워놓은 그림들 보고 늘 멋지다고 칭찬해 주셨잖아. 

비싼 그림책도 구해다 주셨는데 내가 그림 그리는걸 좋아하시니까 그런 거지.

 

“그림은 취미로 해도 되. 우리 딸은 공부를 해야지”


언제나 나를 응원해 주던 엄마가 처음으로 나를 가로막는 듯한 그 낯선 느낌.

No인 것이 분명한 엄마의 이 말에 15살 난 나는 실망하거나 화가 나기 보다 겁이 났다.  

이 느낌은 어쩌면 정말 내가 잘못된 결정을 한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게 했고, 그래서 엄마의 몇 마디에 나는 쉽게 설득당했다. 

 

문제는 엄마의 반대가 아니었음을 안다. 

어쩌면 나는 엄마의 대답을, 아니 나의 최후 결정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왠지 내가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만 하는 일을 선택하는 것이 맞을 거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내 속의 꿈틀거리는 대상에 대한 엄마의 거부와 나의 용기 없음이 문제였던 그 기억 때문이었일까. 

아무런 계획도, 계산도, 기대효과도 없이 그저 그림이 그리고 싶다는 욕구가 깊은 바닷속 고래처럼 떠올랐다. 조용하지만 크고 거대하게.






또 다른 렌즈


나는 내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들을 낳고, 손을 잡고, 밥을 먹이고 눈물을 훔치던 손.


그러는 동안 30여년 넘게 잠자고 있었던 그림 그리는 손을 깨워 보았다. 

4B 연필을 사고 스케치북도 샀다.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불편했지만, 용기를 내서 그림 배우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내 자리를 잡았다.

 

커다랗고 흰 스케치북에 처음 연필선 긋는 일도 두려웠지만, 나는 그 마음 들키기 싫어 4B연필을 꽉 잡고 슥~ 길게 그어 보았다. 참 이상한 일이다. 

한 줄 선 그었을 뿐인데 시원한 물 한모금이 기도를 따라 쫙~ 흘러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림을 시작하니 또다른 렌즈를 끼고 있는 것 같다.


빛과 어둠은 서로를 적대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를 의지하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림자는 그저 붙어만 있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물체가 어디에, 어떻게 놓여져 있는지 위치와 방향을 정확하게 알려 준다. 


'뒷 배경'이라는 말은 얼마나 슬픈 말인가?

그러나 배경을 그려보라. 

배경으로 인해 그림이 얼마나 멀어지고, 가까와지고, 그러다 깊어지는가를 단박에 알 수 있다.

뒷 배경 없는 그림은 곧 날아가 버리듯 불안하고 가볍게 종이위에 떠 있을 뿐이다.


빛과 어둠, 그림자, 뒷 배경...

나는 이 렌즈로 세상을 보고, 사람도 보고, 또 나를 본다.


내 속의 빛뿐만 아니라 어둠도 보지만 그것을 비난하지 않는다.

걸으면서 문득 보이는 내 그림자에도 꽤 오래 눈길을 준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떤 상태로 있는지를 알려주니까.


내 뒷 배경도 그저 시간이 쌓이면서 생성되는 퇴적임같이 놓아두기 싫어진다.


나의 뒷 배경이 나를 얼마나 깊이있게 해 주는 지를 알겠기에 '관리'해줘야지 싶어진다.

많이 읽고, 많이 보고, 많이 생각하면서 그 배경을 가꾸어 갈 일이다.


내 결정이 잘못된 결과일까 두려웠던 15살의 나는, 

이제야 오롯이 내 스스가 한 결정에 용기내어 한 발 내딪어 본다.

나를 붙잡던 할머니의 눈빛은 이 시간을 살아내라 말해주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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