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뱀을 다시 보다
2025년은 을사년이다.
뱀의 띠.
솔직히 2024년 마지막날 까지도 새 해가 '을사년'이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제야의 종소리를 방송으로 지켜보면서 아, 을사년이구나 알게 됐다.
'푸른 뱀의 해'.
을(乙)은 10개의 천간(天干)중 하나로 '청색'을 의미하고, 사(巳)는 12개 지지(地支), 동물들 중 뱀을 의미하기 때문에 올해 을사년은 "푸른 뱀"의 해가 된다.
고백하자면..... 을사년이라니, 마음에 들지 않는다.
뱀이라면 정말 끔찍이도 싫은데, 올 해가 뱀의 해란다.
게다가 관련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을사조약 같은 어두운 역사적 배경까지 연상된다.
지인들이 보내준 새해 카드마다 애써 예쁘게 꾸민 뱀들이 막 귀여운 얼굴로 다정하게 인사를 한다.
고마운 마음을 전해야 하는데, 웃음이 나오질 않아 난감했다.
을사년을 검색해 본 것도 궁금해서라기보다 이런 마음으로 올 해를 보낼 수는 없다는 마음의 불편함 때문이다. 막연한 감정이 아니라, 합리적인 사고로 이 불편함에 대응하고 싶다.
사람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는 것이니, 뱀도 일단 그 끔찍한 외모는 접어두기로 한다.
땅의 기운을 나타내는 12 지지의 그 막중한 멤버로 왜 하필 뱀이 끼어들어 있을까?
'지혜'의 상징
성경에서도 뱀은 저주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지혜로운 동물로 여겨지기도 한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이 이리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과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태복음, 10:16)
고대 이집트의 상용문자에도 뱀은 지혜의 상징으로 씌었다고 한다.
이는 뱀을 사육하는 사람들 또한 이를 증언한다.
뱀을 키워보면, 성격도 대체로 온순하고 주인도 잘 알아보며, 나름의 직관력도 있어 그들은 뱀의 지능이 대체로 높다고 말한다. (실제 동물지능검사에게 낮은 수치가 나오는 경우는 뱀은 시력과 청력이 거의 발달하지 못헸기 때문이라 추측한다)
생전에 할머니 말씀에 의하면, 집을 지키던 뱀이 집을 떠나면 그 집안이 망한다고 하셨다.
그만큼 뱀은 자연재해나 재앙에 대한 동물적 감각이 발달된 동물이라는 것이다. 할머니는 아마도 뱀이 가진 직관력이나 통찰력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 같다.
'치유'의 상징
WHO(세계보건기구)는 뱀이 지팡이를 감고 있는 모습을 상징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의학의 신 '아스클레피오스'가 뱀 한 마리가 휘감긴 지팡이를 들고 다녔다는 그리스로마 신화의 영향 때문이다. 그래서 뱀은 '치유'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실제 의학계에서는 뱀독이 신경계나 진통제 연구에 매우 귀하게 사용된다고 한다.
'을사년스럽다' vs '을씬년스럽다'
을사년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을사조약, 을사늑약이 떠올라 같은 해였을까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얼마 전 본 '하얼빈'이라는 영화에서도 '을사늑약'이 등장한다.
지금도 흔히 쓰이는 '을씬년스럽다'라는 말이 여기에서 유래되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을사조약이 맺어지던 당시의 비통하고 음산했던 분위기 때문에 '을사년스럽다'라는 말이 생겼는데, '을씨년스럽다'로 변하여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뱀에 대한 편견을 조금이라도 덜어내는 것이 을사년을 반기지 않는 마음을 덜어 줄 수는 없었겠지만, 정보를 찾고 기록을 하고 글을 쓰면서 막연한 부정적인 감정은 정리가 되는 듯하다.
뱀은 허물을 벗고 스스로 변화를 꾀한다는 점, 특히 재난이나 재앙에 대한 직감이 발달해 있다는 점, 주인을 알아볼 만큼의 인지기능도 뛰어나다는 점(동물이건, 사람이건 나에게 의미 있는 사람을 알아본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등은 뱀에 대해 마음에 드는 면모이다.
을사늑약이 비통한 역사이기는 하나, 잊혀서는 안 될 것이란 점에서 을사년은 경각심을 준다.
역사 잃은 백성으로 살지 않게 해주는 사인 같은 것으로.
을사년.
꿈틀거리는 뱀, 을사조약, 을사 늑약, 일제 강점기.... 등등의 어두운 것들만 몰고 오던 단어가 이제는 좀 달리 들린다.
푸른 뱀.
자기의 허물을 벗고 한 단계 성장하는, 그래서 푸른빛을 띠는 희망이다.
어두운 역사를 외면하지 않고 기꺼이 직시하는,
다시는 그런 치욕을 겪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낼 것이란 희망의 소리이다.
꺽이었을지언정 부러지지 않았기에 부끄럽지 않다.
어쩌면, 과거 어느 때보다도 올해 우리나라, 우리 국민 개인에게도 절실히 필요한 기운이 아닐까?...
하늘과 땅의 기운이 우리를 응원해 주고 있는 걸까?
지난 5천 년 역사에서 평안했던 시절보다 험난한 시절을 더 많이 겪었고, 그때마다 단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던 민족이다. 우주의 기운이 이번에도 이 나라와 백성을 지키려는 것만 같다.
이제야 나도 진심으로 응원해 본다.
푸른 희망과 성장으로 가득 찬 한 해가 되기를...
모두의 을사년,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