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돈이라지만,
"치즈는 아직 남았는데?"
"금방 먹을 거니까 미리 사 놓지 뭐"
"고기 세일하는 건가?"
"어제도 먹었잖아?"
"매일 먹으면 좋지, 세일할 때 왕창 사"
"아몬드 엄청 고소해 보이는데? 이거 먹어보자"
늘 이런 식이다. 남편과의 장보기.
필요가 소비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소비가 필요를 부르게 되는 기현상을 몸소 실감한다.
계산 후 한도 없이 늘어지는 영수증을 다시 보면서
이걸 꼭 사야만 했을까? 라는 후회도 한다.
남편에게 영수증을 당당하게 내보이며
"이것 보라구, 이런 과소비!!"라고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남편은 이럴 때마다 "시간도 돈이야" 라고 한다.
"어짜피 필요한 물건인데 마트까지 왔다 갔다 하는 시간 줄이고 얼마나 좋아?
가계부에 시간도 적어보면, 딱 보일껄?"
엇....!
"시간 가계부?"
농담처럼 던진 말이 마음으로 훅 들어왔다.
'시간도 돈이구나...'
You can use time however you want.
You can either use it for yourself or against yourself.
오늘의 영어 일력이 준 문장을 다시 읽어본다.
use time.
남편의 농담같은 충고때문이었을까?
시간을 사용할 수 있다(use)는 말에 새삼스레 솔깃해 진다.
시간이 머릿속에서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손에 쥐면 잡을수 있는 실체가 있는 무엇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돈을 쓰면 없어진 것이 보이듯이, 내가 사용한 시간도 사라지지 않고 보인다면 어떨까?
영수증처럼 시간의 사용처가 찍혀나와 보인다면....
"시간 없어"를 입이 달고 사는 걸 보면, 내 시간은 언제나 지출 초과임이 틀림없다.
대체 어디서 쓸 데 없는 시간 지출이 일어나고, 어디서 시간을 더 아낄 수 있을까?
시간 가계부를 써 보라는 남편말을 곱씹으며, 시간의 지출이 눈에 보이도록 '숫자'의 힘을 빌어본다.
1시간을 1만원으로 계산해보면(최저임금을 고려한 건 아니지만, 마침 현재 최저임금은 시간당 10,030만원이다), 하루는 240,000원, 한달은 7,200,000원, 일 년은 86,400,000원이다.
한 달, 일 년까지도 생각이 미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루의 시간 사용만 생각해 봐도 상황 파악은 충분히 될 테니 말이다.
for myself에 사용된 시간이라면 플러스가 될 것이고,
against myself에 사용된 시간이라면라 마이너스가 되겠지.
마이너스 시간을 없애면 나는 시간부자가 되겠구나 싶다.
하지만,
.
.
.
.
.
.
곧 나는 낙담한다.
무엇이 온전히 for myself이고, 온전히 against myself인가 혼란스러운 것이다.
새벽기상 시간 오롯히 읽고 쓰는 데에 사용한 시간은 for myself.
거실을 지나치다 켜 놓은 TV 앞에서 1시간을 훌쩍 넘겨버린 시간은 against myself인가?
창문을 닫다가 유난히도 크고 밝은 달을 보느라 멍하게 보낸 시간은 against myself 인가?
문득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 그냥 계획에도 없던 영화 한편을 보고 나온 시간은?
이런 혼란 자체가 어쩌면 내 시간 사용의 기준이 없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한편으론 어쩌면 시간은 이런 산술적 계산 방식으로 플러스, 마이너스가 딱 나오지 않는 실체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 시간의 유익함을 '따져' 보아야 할까?...
하루를 잘 살아내는 일이기에 나는 이 문제에 꽤 진지해 지고 싶다.
그저 멋진 말, 그러나 막연한 다짐으로 마무리를 짓고 싶지 않다.
나름의 연구와 시행착오를 각오한다.
하지만 당장에 결론을 내리려 하지 말고, 조금씩 구체적인 시도를 해 보자 마음 먹는다.
시간 가계부를 적든, 타임 테이블을 다시 만들든...
'단숨에' 나의 모든 시간을 유익한 것으로 만들지 못해 안달하지 말자.
오늘은 출발만.
질문을 던졌으니, 좋은 출발이다.
질문을 던진 자는 답을 찾게 된다고 했다.
'시간은 돈이다'라는 이 만고의 진리, 듣기에도 지겹고 감흥없던 문장이 이제야 내 것이 된 것 또한 좋은 출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