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합
"엄마, 화학은 물리의 완벽한 부문집합이지만 생물은 아니에요."
아들은 내가 이해하기에 꽤 명쾌하게 과학 분야 간의 관계를 설명해 준다.
"요즘은 융합시대인데, 물리, 화학을 따로 생각할 건 아니잖아?
실제로 화학자인데 노벨 문리학상을 받은 그 누구?? 암튼 그런 과학자도 있지 않니?
블라블라~~~"
장황한 내 문장들에 비해, 아들의 문장은 늘 짧고 명료하다.
정답 여부를 떠나 대답을 듣고 나니, 그의 관심사가 명확히 이해되지 않아 답답했던 마음이 이상하게 풀어진다. 너의 관심사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본인이 나름의 나침반을 가지고 배를 몰고 있으면 됐다 싶다.
대신, 한동안 잊고 있었던 벤다이어그램이 갑자기 머릿속에 쏟아지듯 떠오른다.
전체집합, 부분집합, 교집합, 합집합, 여집합....
동그라미 몇 개만 잘 그리면 문제가 딱 풀린다니~!!!
정답을 찾기 위해 거치는 사고의 과정을 나는 무척이나 사랑했다.
무엇보다 내 주변의 관계를 바라보는데 매우 유용하다.
관계에 지칠 때면, 벤다이어 그램을 그려본다.
나는 어떤 대상의 교집합이자 여집합, 때로는 전체집합인가?
내가 교집합이 되는 대상에게는 사랑과 진심을.
(그들의 일부는 '대상'인 동시에 '나'이기도 하니까)
내가 전체집합이 되는 대상에게는 무조건적인 정성과 배려를,
내가 부분집합이 되는 대상에게는 진심 어린 소통과 배움과 함께 성장을.
문제는 여집합이다.
그림을 보면 "여집합"에 머무는 사람들이라면, 내가 깊이 상처받거나 에너지를 쏟을 필요가 없음이 분명히 보인다. 굳이 '사람들 사이에는 섬이 있다'는 시인의 말을 인용하지 않아도, 집합관계 속의 흰 여백은 섬 사이만큼이나 멀고, 동떨어져 있음을 말해 주고 있으니 말이다.
상관하기 싫지만, 자꾸만 나에게 상처가 되고 떠오는 사람을 정리하는 방법도 생각보다 간단하다.
상처받고 괴로운 것은 그들이 나에게 최소한의 부분집합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들의 이름을 핀셋으로 들어 여집합으로 옮겨 놓아 보자.
그렇게 옮겨 놓으면 그만이다.
여집합에 던져진 이름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들과의 관계에서 어느 정도는 쿨(cool)해 진다.
그러나 '나'라는 존재는 어떤 대상의 "완벽한 부분집합"은 되지 않음을 또한 알아본다.
그것은 완벽한 종속 관계이기도 하니까.
유일하게 내가 부분 집합으로 존재하는 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아닐까?
하지만 내가 어떤 대상에게 완벽한 부분 집합으로 존재하는 건 아닌지 혹은 누구가 나를 그의 완벽한 부분집합으로 매여 놓고 있지 않는가를 점검해 보는 건 반드시 필요하다.
내가 남편의 완벽한 부분집합으로만 살고 있다면_반대의 경우 또한_ 그림을 다시 그려야 한다.
자식이 나의 여집합 쪽에 놓여 있다면, 이 또한 그림을 다시 그려야 할 일이다.
내 품에서 울고, 자고, 먹고, 싸던 그 아들에게서 배움을 얻는다. 옴마, 아빠를 어설프게 옹알이하던 그 아이가 이렇게 내 마음을 노크하는 말을 건넨다.
나의 '완벽한 부분 집합'으로만 보였던 아들이 어느덧 성큼 컸나보다, 나와는 독립된 인격으로, 그러나 전혀 별개인 여집합이 아닌, 여전히 나의 작은 부분집합으로 남아주는 오늘이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