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밭에 씨앗이 떨어지듯
선생님 말은 마음의 흔적이 된다.
어떤 말은 빛나는 별처럼 반짝이고, 어떤 말은 얼룩이 되어 남아 있다.
나를 성찰하는 과정에서 만난 내 모습 속에서도 그 흔적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선생님들은 알고 계실까?
그 말들이 한 여학생이 엄마가 된 지금까지도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을.
“너 나이에 맞는 책을 읽는 것도 중요해 “
내 책상 위의 '죄와 벌' 책을 보며 하신 방문 피아노 선생님의 이 말은 이상하게 지금까지도 이따금 내 머릿속을 맴돌며 나를 불편하게 한다.
서점이나 도서관을 갈 때면 가끔씩 고전문학 코너를 찾는다.
화려한 자기 계발서들 앞에서 온 신경이 치열하게 곤두서거나, 여기를 보세요, 목청껏 외치듯 생경하고 자극적인 제목의 신간들 앞에서 피곤함을 느낄 때가 그렇다.
나는 고전문학을 찾아 조용히 오랫동안 제목을 들여다본다.
가끔씩 책장을 넘기며 가쁜 숨을 고르듯 그렇게 시간을 보내곤 한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 죄와 벌‘도 마주하지만, 나는 일부러 무심한 척 눈길을 거두고 만다.
그 책을 읽으면, 왠지 바람직하지 못한 듯 느꼈던 그때의 나를 마주할 것 같아서일까?
피아노 선생님의 말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일까?
아무튼 나는 지금까지도 '죄와 벌'을 읽지 못했다.
아니, 읽지 않았다.
”이 아이 글씨 대회 내보내 보세요, 교과서 글씨체예요 “
초등학교 1학년때 선생님은 상담 오신 엄마와 교실 책상에서 대화를 나누고 계셨다.
나는 그때 웬일인지 상담 중인 같은 교실에서 친구와 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내 귀에 쏙 들려온 선생님의 말씀.
엄마나, 친구들에게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선생님의 말씀에 나는 ’ 내가 글씨를 잘 쓰는 아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알게 되었다. 나는 내 손끝에서 나오는 글씨 더욱 정신을 집중하면서 잘 쓰려는 노력에 박차를 가했고, 글씨를 쓰는 팔과 손에는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런데 그 후의 반전이 문제였다.
글씨체에 대한 관심이 많아진 나는 교과서 같았던 내 글씨체에 금방 흥미를 잃어버렸고,
어린 눈에 유난히 멋져 보이거나 어른처럼 휘날려 쓴 친구들의 글씨체를 열심히 따라 해 보다가 결국은 교과서 같다던 내 글씨체를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내가 '글씨 잘 쓰는 아이'라는 선생님의 말을 듣지 못했다면, '글씨체'라는 것 자체에 아예 관심을 갖지 못했을 것이고, 지금까지도 어쩌면 '교과서 같은' 진짜 멋진 글씨체를 가지고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글씨를 잘 쓰는 아이라는 칭찬은 우리 엄마에게도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나 보다.
엄마는 갑자기 나를 서예학원으로 보내셨다.
그런데 서예선생님은 내게 생각지도 못한 말씀을 하셨다.
"너는 붓을 아주 잘 다루는구나"
서예 선생님으로부터 '붓을 잘 다루는 아이'라는 아이템을 획득한 덕분이었을까?
흰 도화지에 물감 묻힌 붓을 주저하던 친구들 틈에서 미술시간에 나는 과감하게 쓰윽~ 붓질을 하며 수채화를 빠른 속도로 배워나갔다.
8살, 그 어린 나이의 글씨체를 칭찬하시던 담임 선생님의 말은 나와 함께 40여 년을 흘러 흘러 지금의 그림에 대한 열정을 낳게 했다.
”여자가 전교 회장을 하는 건 좀 그런데....”
나는 이 말씀을 하시는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그 선생님은 내가 몇몇 후보들과 함께 바로 코앞에 앉아 있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옆 선생님을 향해 그렇게 말씀하고 계셨다.
"지금껏 여자 회장은 한 번도 없었잖아?"
나는 잠시 눈을 떨구었다.
내가 뭔가 바람직하지 못한 자리에 있는 걸까? 선생님들을 불편하게 하고 있나?라는 느낌이 들었지만, 곧 내가 왜? 나는 아무 잘못이 없어,라는 생각이 들면서 다시 고개를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진짜 학생 회장 후보는 모두 남자친구들이다.
이때까지도 나는 내가 유일한 '여자' 회장 후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여자 회장 후보'가 아니라, 그냥 '회장 후보'였을 뿐.
그날 나는 전교 학생들 앞에서 이미 준비했던 연설보다 좀 더 긴 연설을 했고, 개교 이래 처음으로 여자 전교회장으로 당선되었다.
`그 남자 선생님은 내가 무척이나 못마땅했겠지' 지금도 가끔씩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뒤 끝 있는 사람도 아닌데, 뒤 끝이 엄청나다.
그 후 나는 대학이나 사회생활을 하면서 내가 ’ 여자‘라는 사실을 종종 인식하게 되었다.
정확하게는 내가 ’ 여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가질지 모르는 편견에 대비하게 되었다는 표현이 맞겠다.
물론 지금껏 누구도 그 남자 선생님처럼 “여자가 하기에는 부적절하다”는 식의 이야기를 코 앞에서 하진 않았지만, 그때 그 선생님의 말이 지금껏 가슴에 남아 '여성이기에 가지는 편견'을 경계하는 사람이 되어 있다.
"이런 그림도 아주 좋아, 엑센트를 주면 확 살아나거든"
미술 선생님은 내 옆에서 마지못해 시간 때우며 붓을 돌리고 있는 남동생의 그림을 보며 말했다.
남동생은 거의 그랬다. 누나인 내가 다니는 학원에 늘 1+1처럼 같이 끼여 '등록당하곤' 했다.
엄마는 남동생의 취향은 고려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림을 그리기 싫었던 것이 분명했던 남동생은 스케치북 위에 여기저기 듬성듬성 흐릿하게 수채화 물감을 발라 놓기만 했다. 나는 가끔 동생의 그림을 쳐다볼 때면 어찌나 무안했는지, 차라리 그가 그냥 집에 가줬으면 싶을 지경이었다.
그런 동생의 그림을 향한 미술 선생님의 칭찬은은 내 귀만 번쩍 뜨이게 한 것이 아니라,
내 눈도 번쩍 뜨이게 했다.
'이런 그림도 아주 좋다고? 확 살아난다고?'
선생님은 동생의 손에서 붓을 받아 소량의 물을 조절하며 다소 강한 색깔로 명암을 툭툭 그려 넣었다. 몇 번의 붓질이 오가고 선생님은 멀리서 그림을 다시 보게 했다.
우와~ 정말 멋지다.
내가 하나하나 공들여 물감색을 입힌 수채화와는 또 다른 느낌의 시원하고 맑은, 그러나 강렬한 포인트를 드러내는 멋진 느낌의 수채화였다!
나는 그 그림이 감동스럽기까지 했다.
심지어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동생의 재능이 부럽기까지 했다.
꼼꼼하게 열심히 잘하려는 나의 붓질은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 이후 나는 그림에 대한 희미한 경계(편견이나 선입견 같은) 같은 것이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까지도 부족한 나의 그림을 볼 때나 다른 이의 그림에서 불편한 시선이 느껴질 때면,
미술 선생님이 목소리가 들리는 듯 생생하다.
'첫눈에는 이렇게 보일 수 있어. 하지만, 어떤 포인트를 만나면 확 살아나는 그림이 될 수 있을 거야...'
라고 생각한다.
덕분에 나는 함부로 '이른 판단'을 하려는 내 눈과 마음을 단속할 수 있게 되었다.
돌이켜 보니 나의 현재 마음이나 생각 중에는 선생님의 말이 씨앗이 되어 자란 것들이 꽤 있다.
그야말로 말이 씨가 된 것이다.
마음밭에 떨어지는 씨앗.
선생님의 말은 그런 것인가 보다.
한 영혼의 마음밭에 떨어지면,
곧 사라져 버리는 씨앗이 되기도 하지만,
그 영혼과 함께 계속 자라서 성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좋은 열매를 맺을 수도, 나쁜 열매를 맺을 수도 있다.
다행히 나에겐 좋은 열매를 맺게 해 주는 말씀들이 더 많았지만,
지금까지도 활과 살이 되어 마음을 찌르고, 아프게 하는 말들도 분명 있었다.
선생님의 말(2)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