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안 돼'의 가벼움
입학 전까지는 다소 형식적으로 느껴졌던 말들이 영재교 생할에선 진심이 되곤 한다.
탐구나 연구가 대표적으로 그렇다.
수학이나 과학같은 교과목을 배우면서 일반 학교보다는 좀 더 비중있게 하겠구나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는데, 실제 영재교에서 연구와 탐구는 교과목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지속적인 교육과정 자체였다.
문제풀이집도 해설집도 없는 날 것(live)의 교과서.
스스로 판단하며 문제를 탐구하고, 결과를 발표, 공유하면서 평가를 받는다. 이 과정에서 답이 틀렸을 수도, 방향을 잘 못 잡았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나 불안감으로 아예 시도조차 못하거나 비슷한 사례를 좇아 '안전한 길'로만 가려는 경우 언젠가는 한계에 부딪혀 자신감을 잃게 된다.
나는 입학 초기 이런 환경에서 아들이 힘들어 할까 꽤나 염려스러운 마음으로 지켜보기도 했다.
틀린 문제에 별표를 하는 것만으로도 울음을 터트리곤 했던 아들이 유독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나 불안감이 높아보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타고난 기질이기도 했지만, 나는 그런 성향을 진지하게 생각지 못했고 어떤 상황에 있든지 엄마인 내가 열심히 잘 키우기만 하면 해결될 일이라 생각했다.
'No'
아이가 어렸을 때는 더욱 그랬던 것 같다.
가장 큰 이유는,
위험한 일 앞에서, 아니 내가 보기에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일 앞에서.
안 돼, 그렇게 하면 위험해,
그건 먹으면 안 돼. 만지면 안 돼.
여기선 뛰면 안 돼.
신발은 맞춰서 신어야지, 짝짝이로 신으면 안 돼.
혼자 딴 짓하면 안 돼.
아들을 잘 키우고자 하는 내 마음은 대부분 'No'로부터 표현되었다.
그렇게 말해 주었을 때, 나는 아이에게 뭔가를 '확실히 가르치는' 느낌을 가질 수가 있었다.
그러나 안돼! No라는 말 앞에서는 우리는 행동만 멈추는 것이 아니라, 생각도 멈추게 된다.
부정적인 상황이 배움의 소재가 되는 것을 왜 경계하지 못했을까?
처음 'No'라고 말한 때가 언제, 어느 순간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하겠다.
신생아 때였을까? 기어다니기 시작했을 즈음이었을까?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아들은 아마도 '금지어'가 주는 불안과 긴장을 온 몸으로 느꼈으리라.
그 후로도 무심코 던졌던 수많은 ‘No’라는 말.
그 소리가 아이의 마음에 빨간색 신호등을 켜고 온 몸의 세포와 신경들을 긴장상태로으로 몰아갈 수 있음을 생각지 못했다.
No의 또다른 이름
아들은 또래 아기들과는 달리 지나치게 신중했던 것 같다.
신기한 장난감이나 사물을 보아도 덥석 달려들지 않았다. 손가락을 내밀어 조심스레 만져보거나 뚫어지게 쳐다만 보는 경우도 있었다. 엄마가 보기엔 답답하기도 초조하기도 했다.
덥석 달려들어 엉망을 만들어도 좋으니 맘껏 즐겨도 될텐데...
그런 반응이 며칠을 가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날 보면 놀랍기도 했는데, 그렇게 조심스럽게 만져보고 쳐다보기만 하던 교구들을 놀랍게도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가지고 놀고 있는 모습이라니!
타고난 기질이라 하더라도 내가 그간 수없이 내밷은 No라는 금지어가 아들의 지나치게 신중한 성향을 좀 더 자극하지 않았을까 반성도 한다.
지금 돌이켜보니 No라는 말은 사실 엄마인 나의 불안의 표출이었다.
아이의 반응을 끝까지 기다려주지 못하고 혹시나 잘 못될까 내 판단으로 일찌감치 행동의 문을 닫게 하는.
그렇게 크게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서 내 마음의 불안을 숨길 수는 없었을까?
아이의 손을 잡고 어깨를 감싸주고, 눈을 맟추며 낮은 목소리로 말해 주어도 아이는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배울 수 있었을 텐데...
“안 돼! 먹으면 안 되는 거야!!!”라고 소리치며 그 작은 손아귀에서 나뭇잎을 낚아채 버리기 전에 말이다.
아들은 순간 굳은 표정으로 큰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바라보았는데, 그 눈 속에는 눈물인듯, 놀람인듯, 두려움인듯, 슬픔인듯 온갖 감정들이 모여있는 듯 했다.
나뭇잎을 꽉 움켜잡고 있던 긴장된 작은 손을 부드럽게 잡아주고, 그 많은 감정이 담긴 눈빛을 좀 더 오래 바라보며 이야기해 주었어야 했다.
"J야, 이건 나뭇잎이라는 거야. 한번 봐봐~ 신기하게 생겼지? 그런데 이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거든. 몸 속으로 들어가면 J의 배 속을 아프게 해..."
의미를 정확히 모르는 나이, 말이 통하지 않아도 괜찮다. 아이는 No 라는 단어를 불안감으로 느끼지 않고 ’조심해야 하는 마음‘이 필요한 상황이구나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금지의 선
영재학교에 입학했다 하여 그의 기질이 드라마틱하게 변해서 모든 상황에 호기심을 가지고 달려들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아들은 지금도 처음 해보는 경험과 수업, 친구관계, 낯선 기숙사 생활을 하며 불안해하고 이것을 이겨내고자 애써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아들이 없는 빈 방, 그의 책상, 그의 침대에 앉아 그의 마음이 되어 본다.
나는 이제야 내 아이의 불안이 보이고, 그래서 그의 주저하던 행동이 단지 용기나 호기심 없음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한다. '그래 괜찮아', '왜'라는 이유를 묻기도 전에 '안 돼' 라는 말을 더 먼저, 더 많이 하며 키웠구나.
행동을 멈추게 하려고 마음의 작동까지 멈추게 하는 말.
그 말들을 좀 더 아껴 사용했더라면, 아들은 좀 더 자유로운 욕구를 발산하며 영재교 생활을 즐기고 있지 않을지 모를 일이다.
사실 현실적으로 아이를 키우다 보면 ’안 돼‘라는 말이 필요할 때가 너무나 많다.
그 말을 하지 않고 방치하는 것이 오히려 부모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예의없는 일, 잘못에 대한 올바른 교육은 반드시 필요하다.
다만 내가 후회하는 것은 '너무 쉽게' 그 단어를 내밷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행동하는 아이의 마음에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고 듣는 단계없이 무조건, 언제나, 내가 먼저, 금지의 선을 그었다.
용기를 꺽지 않는 No 사용법
엄마인 내가 No라는 그 말을 좀 더 지혜롭고 성숙하게, 아끼고 아끼며 사용했어야 했다.
No는 그것이 무엇이든 멈추게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만약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No라는 말에 무척이나 인색한 사람이 되고 싶다.
아들에게 뿐만 아니라, 내 자신에게도.
아들에게는 특히 그렇다.
No가 필요한 상황에서 자기 행동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기다려 주는 엄마.
자기 행동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아니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선택이기에 용기를 가지고 그 일을 계속 할수 있다.
아이의 마음을 먼저 읽으려는 엄마의 말은 아이가 불안과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준다.
이 힘을 충분히 키운 아이라면 처음 경험하는 환경이나 사람들과의 관계, 어려운 과제 앞에서도 마음이 묶이지 않고 용기를 낼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용기가 영재교와 같은 자기 주도적인 환경에서도 위축되지 않는 아이로 지켜낼 수 있다.
내 자녀에게 No라 말하기는 얼마나 쉬운가?
그러나 쉬운 만큼 그 말의 열매는 참으로 작고 미약하다.
반면, 아이의 자기 선택과 결정을 기다려주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가?
그러나 어려운 만큼 그 말과 기다림의 열매는 크고 단단하다.
<선배엄마가 후배엄마에게>
정말로 단호하게 말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No라는 말이 아이의 마음 용기를 꺽을 수 있는 말은 아닐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 집에 굴러다니는 레고가 얼마나 많은데 또 레고를 사겠다는 거니? 안 돼"
" 다음주 부터 시험기간인데 지금 농구하러 나가는게 말이 되니? 지금은 안 돼"
" 이건 아니지, 틀렸잖아! 주제가 이게 아닌데 엉뚱한 얘기부터 쓰면 어떻하니? 다시 써봐"
" 안 돼! 계획 먼저 세우고 공부해야지"
이런 상황을 다시 겪게 된다면 저는 10번 정도는 먼저 생각부터 해 볼 것 같습니다.
'지금 No라고 말하는 것이 아이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것일까?'
내 자녀의 성향에 엄마인 내가 하는 말, 엄마의 언어가 얼마나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저는 조금 늦게야 되돌아보고 후회도 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반복되는 부정적인 말이 있다면, 그것이 아이의 자존감을 약하게 만들고 있지 않은지 살펴봐 주시기 바랍니다.
판단과 결정을 스스로 할 수 있는 아이, 자기 꿈에 대한 열정과 실천력을 가진 아이.
영재교 입학 정보보다, 입학 자체보다 엄마가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노력해야 할 일인듯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