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어도 다시한번
오래 참는 것.
이것이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임을 깨달았다지만,
막상 그런 현실이 닥쳤을 땐, 참아 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복습도 과제도 다 못했음에도 책상 앞에서 졸거나 핸드폰을 보고 있을 때,
시험기간 중에도 농구를 하고 오는 그 당당함에,
테스트 결과를 받고도 달라지는 것 없는 무념무상 태도에...
나는 때로 인내의 한계선을 넘나들곤 했지만
다시는 아들의 목에 목줄을 걸고 끌고 다니는 끔찍한 내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기에
그저 묵묵히 마음의 거리두기를 하였다.
아들에게 바라는 것 만큼, 딱 그만큼만 견뎌보자.
저런 행동에도 나름의 이유나 생각이 있겠지...
멀어저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그런데, 거리를 두니
어느 순간 J의 생활 방식과 일상의 리듬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들은 소위 야행성 스타일이었다.
집중할 수 있는 시간대가 나와는 완전히 반대였고, 자신이 편안하게 느끼는 환경이 확실히 있는 아이였다.
그리고 모범답안 같은 전형적인 시간관리, 노트정리 방법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내 눈에는 게을러만 보이는 그 태도 속에, 나름의 질서와 완성 기준이 있었다.
알게되니, 이해도 되었다.
그 방식을 존중하고 믿어 주는 것이 내가 아들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의 모습이었다.
"그럼 더 노력을 했었어야지!"
"최선을 다하지 못했으니까 이런 결과가 나오는 거야"
다른 사람들에게는 감히 쉽게 내밷지 못하는 이런 말이
내 자식에게는 얼마나 쉬운가?
방문 넘어 보이지 않는 작은 책상에서 그 아이가 얼마나 마음 졸이며 공부했을지,
열심히 해도 안 풀리는 문제와 시험 점수를 보며 얼마나 좌절했을지..
엄마 앞에선 무심한 표정으로 내 놓는 성적표를 보며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한 얼굴을 했을지...
전에는 미처 몰랐던 아들의 모습이 보이는것만 같아
나는 감히 그의 '열심'을 어떤 말로도 평가할 수가 없었다.
'열심히 했는데도 이렇다'는 그의 항변이 답답하고 화나는 변명처럼 느껴지곤 했었다.
그런데 그 말이 안타깝고 가슴 아파해야 할,
그러므로 무한한 응원과 용기를 주어야 할 아들의 위축된 마음인듯 느껴졌다.
스스로 성장하는 아이
아들은 결국 목표했던 영재교에 합격했다.
자신의 방식을 가지고 공부힌 결과로 합격하지 못했다면,
나의 목줄에 끌려다닌 결과로 요행히 합격했더라면,
입학 후의 영재교 생활이 행복했을까?
나는 그렇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철저히 자신의 주도적인 시간관리와 스스로 이끌어 가야하는 환경에서 그가 누리는 것은 무한한 해방감뿐이었을지 모를 일이다. 더욱이 부모와 떨어져 있는 기숙사 생활은 그릇된 방향으로 이끄는 위험요인이 되기도 한다. 억압적인 통제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으로 불규칙한 일상과 게임등에 빠져 자기 조절에 실패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재교에서 선행되어야 할 것은 자기 주도성에 대한 건강한 경험이다.
자신의 내적 동기로 스스로 움직이며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해 나가는 것.
그런 과정을 묵묵히 응원하고, 간섭이 필요한 때에만 지혜로운 조언과 도움을 주는 부모가 필요하다.
앞장 서서 진두지휘하는 부모와 함께라면,
빨리 갈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오래 갈 수는 없을 것이다.
'아이들은 믿어주는 만큼 자랍니다'
교과서 명언같아서 아무런 감흥조차 없었던 이 말을 수없이 되새겨 보았다.
이미 고등학생이 된 아들은 엄마에게 받은 사랑을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그것이 사랑이라고 느끼고는 있을까?
구속이고 속박이었다 느끼고 있지는 않을까?
아직도 자신이 없다.
아들이 배우게 될 사랑
미워지는 것, 화내고 책망하는 것, 비난하는 마음은 얼마나 쉬.운.가?
이런 마음이 쉬운 건 '소비'되어 버리고 마는 감정이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사랑하는 것, 믿는 마음은 얼마나 어려운가?
이 마음이 어려운 건, '생산'해야 하는 감정이기 때문인 것 같다.
미움과 분노는 감정의 쓰레기 처럼 쏟아부어 버리면 그만인 거다.
그러나 사랑는 내 속에서 참고, 견디고, 희망을 잃지 않으면서 천천히 키워내야 하는 감정이다.
흔들리고 비에 젖어가며 꽃을 피우고,
열매 맺는 감정이기에 이토록 어려운 것이다.
내가 아들의 얼굴을 매일매일 보면서 오래 참는 사랑, 모든 것을 믿으며, 바라며, 견디는 그런 사랑을 줄 수 있었던 시간은 중학교 시절 절반 정도가 전부였다. 이제는 너무 늦어버린 건 아닐까 안타깝기도 했지만, 지금부터라도 나는 온 마음을 다해 이 사랑을 전하려고 노력한다.
아들을 15년이나 키우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아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사랑하는 법을 알 것 같다.
‘엄마는 나를 언제나 믿어줬어.
내가 잘못한 것, 거짓말한 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냥 믿어 준거야.
나를 사랑해서..'
아들이 자라 부모가 되어 자식을 키우게 되었을때,
그릇된 부모의 사랑을 하게 된다면, 그건 오롯히 나의 책임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두려웠다.
아들에게 진정한 부모의 사랑을 보여주는 엄마가 될 수 있기를.
그래서 아들 또한 자신의 가족과 자녀, 아끼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어른으로 자라나 주기를.
나는 그가 최우등생으로 졸업하고 최고의 대학에 입학하는 것보다
더욱더 절실한 마음으로 기도한다.
<선배엄마가 후배 엄마에게>
'믿음'이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특히 자식을 믿는다는 것이 말이죠.
그런데 자식을 믿지 못하겠다는 건 자식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되었습니다.
믿지 못하는 감정에는 늘 불안과 두려움이 있었으니까요.
생각한 대로 안 되면 어쩌나하는 나의 불안과 두려움이 자식을 믿지 못하게 만들었어요.
그런데,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대상으로 하지 않습니까?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확인'이지요.
우리는 진심으로 자식을 믿고 있는 걸까요?
혹시나 자식을 통해 나의 불안과 두려움을 확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자녀를 믿기 위해서는 먼저 자녀의 모습 있는 그대로 보는 과정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내 시선과 기준으로 평가하여 책망하기 전에
왜 그렇게 행동하고 생각하는지 그 마음을 먼저 읽어봐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식과도 거리두기가 필요한 것 같았어요.
물론 마음의 거리두기죠.
엄마의 통제나 잔소리에 따라 움직여서 하는 행동이나 생각이 아니고,
아이 스스로 선택해서 하는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지켜봐 주세요.
지켜보는 과정에서 응원도, 격려도 진심을 다해 해 주시구요.
잘 못하는 것도, 실패도 좋은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엄마의 시선으로 그것을 '실패'라 부르기 전에
긴긴 과정을 통해 성공을 위한 예방주사라 말해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