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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 Jun 05. 2024

열정의 유통기한

열정에는 죄가 없다.


칠 년전 그는 자신이 그림을 위한 부름받았다고 판단해 군 복무를 그만두었고, 예술 활동의 과점에서 다른 모든 활동을 다소 멸시하듯 내려다보았다. 이제 그에게 그럴 권리가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래서 그에 관한 모든 추억이 불쾌했다. 그는 이 화실의 이 모든 화려한 도구를 괴로운 심정으로 떠다보고 우울한 기분에 젖어 서재에 들어섰다.

<부활1> 레프 톨스토이, P.46, 민음사



부활의 주인공 네홀리도퓨는 서재로 향하던 중 자신의 화실을 지나치며 이렇게도

불편한 마음_멸시와 불쾌, 괴로움과 우울감을 느낀다.

군 복무까지 포기하고 선택한 그림이었지만, 

그는 결국 그림에 대한 열정을 끝까지 가지고 가질 못했나 보다.


열정이 식어버린 추억은 내게도 그렇다.

불현듯 떠오를 때면, '불쾌해지고, 괴롭고, 우울하다'. 

열정을 다해 사랑했던 사람과 끝내는 헤어짐으로 끝나버린 아픈 기억처럼.




내가 '좋아하는 것'이란, 어느 정도의 뜨거움과 무게가 있어야 진실이 될까?


크로키를 시작하니, 

그렇게 내 그림의 전부였던 소묘작품들은 또 뒷전이다.


글쓰기에 빠져들면, 그림은 멀어지고,

그림에 빠져들면, 글과 책은 또 멀어진다.


얼마전에는 사진에 또 흥미가 생겨 관련 책들을 5권이나 대출했다.

사진에 빠지면 또 그림은 멀어질까?...


여러가지를 시도해 봐야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을 찾을 수 있어.

라는 말은 진심 옳은 말이지만,  되돌아 보면 나를 허망하게도 한다


열정의 온도가 식어버리는 일들을 바라보며,

'내가 좋아하는 일, 사랑하는 일'이라 확신했던 그 마음은 진실이 아니었던가?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열심히 산을 올라갔는데, 

"어, 이 산이 아니었네?" 가 이런 느낌일까....





열정의 유통기한을 생각한다.

짧게는 한 두달, 길게는 1-2년 겨우.

이럴땐 내 스스로에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느껴져 

마음이 불편하다. 네홀리도퓨가 화실을 지나칠 때의 감정을 보는듯 하다.


한 장소에서 30년을 넘게 장사해 오신 노포집 할머니.

좁은 길이지만, 십수년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는 사람들...

평생 한 분야에 대한 연구와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들... 


그렇게 묵직하고 단단하게 '나 다움'의 콘텐츠를 가지고 사는 모든 사람들,

그 콘텐츠가 무엇이든 간에 

무조건 부럽고, 존경스럽다.

그렇다. 무조건이다.


나에게 아직 그런 콘텐츠가 없는 것은 

내 열정의 유통기한이 너무 짧기 때문일까?....




아니, 은 나는 답을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좋아하는 것에 대한 열매를 빨리 맺고 싶은 욕심,

좋아하는 것이니까 '당연히' 쉽고 재미있게 탐스런 열매를 얻으리라는 낭만? 같은 것이 

내 열정의 온도를 너무 빨리 식게 하는 원인이라는 것을...


좋아하는 마음, 열정으로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은 쉽지만, 

그 일을 끝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은 쉽지도, 낭만적이지도, 즐겁지만도 않다.


약속한 루틴을 지키고, 포기하지 않고 하나하나 선을 넘어가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노력, 외로움도 있는 과정을 거쳐야 "매듭"을 맺을 수가 있는 것이다.


시작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지속하는 일,

지속하는 일만큼 어려운 일이 매듭짓는 일.


내 열정의 유통기한을 의심했던 건 이런 진실을 잊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열정은 그야말로 불꽃일뿐이지 않나...

불꽃이 그대로 '열매'이기를 바랬던 내 착각이 문제였을 뿐.

 

결국, 내 열정에는 죄가 없다.


열정이 열매맺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노력과 인내와 포기하고 싶은 마음과의 

전쟁이 필요한가.  

값없이 열정의 열매를 얻으려는 그 마음이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었음을 고백한다.

좀 더 깊어지고, 묵직한 존재의 나를 만나고 싶은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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