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팅커, 테일러, 솔져, 스파이

정통 스파이물 애호가를 위한 종합선물셋트

by 책거미
포스터_02.jpg TINKER TAILOR SOLDIER SPY


안녕하세요. 리뷰어 책거미입니다.


오늘 소개할 영화는 정통 스파이 장르물 <팅커 테일러 솔져 스파이(TINKER TAILOR SOLDIER SPY)>입니다. 이 영화는 첩보소설의 대가인 존 르 카르(John Le Carr, 안타깝게도 올해 12월 12일에 작고하셨습니다)의 동명 소설에 기반한 작품입니다. 첩보액션물과는 거리를 두는 정통(Classic) 첩보물로, 실제로 원작자인 존 르 카르가 첩보원으로 활동했던 경험을 녹여낸 영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선 제가 스파이 장르물의 열렬한 지지자라는 것을 먼저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영화계에는 수많은 스파이 영화들이 있지요. 첨단무기와 근사한 수트핏으로 무장한 매력적인 첩보원의 액션과 로맨스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많은 대중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대표적으로 미션임파서블 시리즈와 007 시리즈가 있고, 그외 기타 스파이물로 구분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이러한 영화에 길들여진 분들이라면 <팅커 테일러 솔져 스파이>는 약간 싱거울 수도 있습니다. 기존의 첩보액션영화들이 추격전, 총격전 등 자극적인 액션으로 MSG를 첨가했다면, 이 영화는 그것들을 걷어내고 장시간 공들여 우려낸 사골육수의 깊은 맛을 전달하는 원조 설렁탕과 같은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screencapture-netflix-watch-70202128-2020-12-31-22_48_54.png 요원들에게 각각 코드네임을 부여한 MI6의 수장, 콘트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재미가 없고 늘어지느냐? 그건 또 아닙니다. 우선, 콜린 퍼스, 개리 올드먼, 마크 스트롱, 베네딕트 컴버배치, 존 허트, 톰 하디 등 연기 잘 하고 유명한 배우들은 죄다 동원하여 극에 풀어놓습니다. 극의 중심점인 '조지 스마일리(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를 떠올리시면 됩니다)' 역의 개리 올드먼의 연기가 일품입니다. 두꺼운 안경 너머로 느껴지는 냉철한 판단력이 첩보원으로서의 그의 연륜과 능력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밖의 배우들은 조연으로서 활약하는데 모두 각자의 몫을 충실하게 연기해 냅니다. 특히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마크 스트롱의 연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냉전이 무르익은 1970년대 영국 첩보기관인 MI6(The Secret Intelligence Service, 통칭 SIS) 내부에 첩자가 있다는 사실을 접하게 됩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부다페스트에 파견된 짐 프리도(마크 스트롱)가 총격을 당하는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되죠. 현역에서 은퇴한 조지 스마일리(개리 올드먼)가 내부 고발자로부터 배후를 알게 되고 이 배신자(Mole, 두더쥐)를 색출하는 과정을 그립니다. 조직의 수뇌부인 '서커스(The Circus)'의 구성원 빌 헤이든(콜린 퍼스), 토비 에스터헤스(데이비드 덴시크), 로이 블랜드(키어런 하인즈), 퍼시 엘레라인(토비 존스) 중에서 누가 배신자인지 찾아야 하죠. 이 과정에서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하고 함께 얽히고설키면서 극의 긴장감을 조율해 나갑니다.


screencapture-netflix-watch-70202128-2020-12-31-22_49_45.png 사건의 핵심인물, 카를라


주인공인 스마일리는 내부의 적을 찾아야 하는 것과 동시에 외부의 위협인 '카를라'라는 인물도 같이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 처합니다. 사실 모든 사건의 핵심 축은 이 '카를라'라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때 스마일리가 직접 접촉하여 그를 회유하기 위해 애를 썼으나 실패하고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본국으로 송환되는 인물이죠. 영화 속에서는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상당한 지략과 수완을 지닌 동구권의 스파이로 연출됩니다.


이 영화는 현실에서 실제로 있을 법한 스파이들의 첩보 세계를 보여줍니다. 다만, 그 연출 방식에 있어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어떤 인물에 대한 장면인지 집중하지 않으면 흐름을 놓치기 일쑤입니다. 관객들과 함께 단서를 추리해 나가는 기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연출자는 4명의 용의자라는 4지선다형 퀴즈에 여러 가지 덫을 놓아 두었고, 관객들은 스마일리와 함께 퍼즐 조각을 맞춰나가야 하는 입장에 놓여있죠. 보면서 상당히 영리한 연출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냥 별 의미 없는 장면인 줄 알았던 것이 후반부에 가면 이것 또한 하나의 설계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screencapture-netflix-watch-70202128-2020-12-31-23_51_28.png 사랑찾아 목숨거는 낭만적인 스파이도 물론 존재합니다.


영화의 스토리 라인이나 내러티브 외에도 당시의 시대상을 재현한 의상, 시각 미술 또한 볼거리입니다. 필름 그레인 필터를 입혀 당시 영상기록물의 톤&매너를 시각적으로 전달합니다. 한편으로 스파이라는 직업적 특성에서 오는 고충들이 은연중에 드러나기도 하는데요. 임무와 삶의 균형, 인간으로서 겪는 가치관의 갈등 등이 나타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톰 하디가 연기한 리키 타르라는 첩보원의 경우, 사랑에 빠진 타국의 첩보원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건 미션에 임합니다. 유능한 첩보원인 조지 스마일리 역시 가정과 임무에서 모두 성공하지 못한 인물로 그려지죠.


screencapture-netflix-watch-70202128-2020-12-31-23_52_39.png 과거를 회상하는 스마일리, 개리 올드먼의 연기가 일품입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개리 올드먼이 카를라와 처음 만났던 장면을 회술하면서 펼친 독백연기와 엔딩 시퀀스였습니다. 카메라 무브먼트와 개리 올드먼의 격앙된 연기가 잘 융화되어 몰입감을 선사합니다. 극의 내러티브 측면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장면이기도 합니다. 결말부에서는 결국 배신자를 찾는데 성공하지만 씁쓸한 뒷맛을 남기게 됩니다. 영화 속에서 어느 정도 암시가 되었지만 애매모호하던 사실도 결말에 가서는 확실하게 수면위로 부상하게 되죠. 하지만 상당히 우아한(?) 연출로서 마무리가 됩니다. 훌리오 이글레시아스가 부른 'La Mer'라는 곡과 함께 말이죠.


screencapture-netflix-watch-70202128-2020-12-31-23_51_52.png 콘트롤이 죽고, 그 후임으로 수장을 차지한 퍼시 엘레라인. 과연 그가 배신자일까요?


그럼 이제는 결론을 말해야 할 시간이네요. 이 영화는 분명 잘 만들어진 첩보 영화입니다. 본인이 추리소설 애호가이고 퍼즐푸는 것을 즐기며, 스파이 영화를 좋아한다 싶으면 일단 무조건 한번 시청하시기를 권하는 영화입니다. 놀란 감독의 <테넷>이 끊임없이 관객의 두뇌에 양자물리학 같은 이론들을 때려넣는 영화라고 한다면, 이 영화는 관객이 영화에 흥미를 잃지 않게 떡밥을 하나씩 흘리는 영화에 가깝습니다. 감독은 낚시꾼, 관객은 물고기라고 표현하고 싶군요. 물론 결말부에 이르러 낚시꾼이 잡았던 물고기를 방생하는,서로 윈윈하는 관계입니다.


생각해보면, 냉전 당시도 그렇지만 오늘날에도 방첩활동의 중요성은 날로 높아지는 것 같습니다. 현재도 강대국들이 자국의 안보에 위협이 된다면 무인드론을 통해 요인암살을 하는 경우도 발생하니까요. 세계가 점차 디지털화되고 가상화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우리 개인의 사생활 침해 위협은 과거보다 더욱 높아졌습니다. (미국 국가안보국의 방첩활동을 그린 다큐멘터리 Citizen4를 추천합니다).


screencapture-netflix-watch-70202128-2020-12-31-23_54_03.png 실체에 접근한 스마일리, 조마조마한 연출이 인물의 감정선과 맞닿아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는 스파이들이 자국의 안보를 위해 암약하는 숨은 영웅처럼 묘사되지만 타국의 입장에서는 기밀정보를 빼가서 안보를 위협하는 위험인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산업 스파이의 경우 한 국가의 산업 경쟁력을 취약하게 만들 수 있는 파괴력을 가집니다. <팅커 테일러 솔져 스파이>에서는 내부붕괴 위기를 극복하는 MI6의 저력을 드러내지만 이는 결국 어떠한 인물을 길러낼 것인가의 질문으로 귀결됩니다. 일종의 리더십과 조직관리의 문제로도 볼 수 있겠네요. 경영자라면, 이 영화를 통해서 조직 내부의 위험을 어떻게 캐치하고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같은 경우, 현재 대한민국의 방첩능력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생기더군요. 주변에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둘러싸여 있고, 핵폭탄을 가진 적국을 바로 이웃으로 두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와닿는 것 같습니다.


screencapture-netflix-watch-70202128-2020-12-31-23_53_17.png 이 라이터는 영화에서 중요한 매개물로 등장합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독자 여러분도 한 번 영화를 감상하시고, 다른 관점에서 첩보의 역사와 그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이상으로 <팅커 테일러 솔져 스파이>의 리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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