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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의 이야기를 계속하기 위해선 전시 마지막 날로 가야 했다. 「사라지는 공간들」전이 가장 큰 난관에 봉착한 날이기도 했다. 뒤풀이 메뉴 선정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다. 나는 작가들에게 법인 카드의 한도액을 설명하고 경우의 수를 좁혀나갔다. 신중을 기해 택한 곳이 숯불 꼬치구이 집이었다. 진한 고기 냄새와 하얀 연기를 특수효과 삼아 그간 묵혀둔 잡음과 고민을 하나둘 털어놓기에 맞춤한 장소라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나는 선배의 이야기를 불판 위에 던지듯 말했다. 「갤러리를 찾아서」와 관련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소설의 내용과 선배의 행적을 추적해나간 일, 그리고 소설가와의 전화 통화까지 털어놓았다. 선배의 신분이 거짓이었다고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작가들은 놀라워하면서도 저마다 다른 반응을 보였다.
“아, 소름! 그게 실화였어요?”
“실화라기보단 설화에 가깝지 않을까요. 다르게 말하면, 모티브를 공유한 거죠.”
“그 영화 생각나요. 미술관이 살아있다.”
“미술관이 아니라, 박물관이요.”
“선배분이 그림 안으로 들어갔을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어쩌면요.” 내가 말했다.
“그게 물리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요. 뭐, 에이알이나 혼합 현실 같은 건가? 미디어아트 작가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공대 대학원을 졸업한 미디어아트 작가는 팔짱을 끼고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러더니 엉뚱한 답을 내놓았다.
“그 남자는 어디에 있대요?”
“누구요?”
“중산모를 쓴 남자.”
“이태원에 있는 무슨 꼬칫집이랬어요. 아니, 샤슬릭이랬나?”
“아, 우즈베키스탄 음식점 말씀이죠?”
“우즈베키스탄 음식점도 있어요?”
“예전에 한 번 먹어봤어요. 양 꼬치 정말 맛있던데.”
“우리 인간적으로 닭꼬치 먹으면서 양 꼬치 얘기는 하지 맙시다.”
“한번 만나보고 싶다. 그림 속 남자라니.”
음식으로 잠시 새어 나갔던 이야기는 일러스트레이터에 의해서 제자리로 돌아왔다.
“무섭지 않아요?” 회화 작가가 두툼한 살코기를 우물우물 씹으며 말했다. “왠지 꿈에 나타날 거 같아.” 그는 기이한 인물을 화폭에 담아내는 작가였다.
한동안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던 미디어아트 작가가 불쑥 자신의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모스크바의 트레차코프 미술관에서 연수 프로그램에 참여할 큐레이터를 모집한다는 글이 깜빡이고 있었다.
“여긴 왜요? 저 러시아어 못하는데.”
작가가 직접 링크를 눌러 미술관 홈페이지로 들어간 다음 다시 신관을 클릭했다. 화면 상단에 익숙한 글귀가 나타났다.
‘<빛과 어둠> 모스크바전.’
“연수 일정이랑 기획전 기간이 겹치더라고요.”
해당 페이지에는 「갤러리를 찾아서」도 있었다.
“이게 왜요?”
“그 그림이 사라진 건 아니니까요.”
“정말, 거기에 있을까요?”
“누군가는 있겠죠.”
*
<빛과 어둠> 모스크바전은 첫날 간담회 일정이 모두 종료된 후 관람했다. 「갤러리를 찾아서」 앞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화랑에 선 중산모 쓴 남자는 2년 전과 변함이 없었다. 아무래도 그를 선배라고 생각할 순 없었다. 다음 날은 사무국 직원에게 소개받은 복원 전문가를 대동하고 작품 앞에 섰다. 최근에 변형된 부분이 있는지 확인해달라는 내 요청을 의심 없이 받아들인 덕분이었다. 그들은 나의 부탁을 연구 목적으로, 연수 과정의 연장으로 이해한 것 같았다. 그는 돋보기를 이용해 그림 구석구석을 확인했다. 그다음 디지털 확대경을 그림 가까이 갖다 대자 그의 오른손에 들린 태블릿 화면 위로 확대된 그림이 나타났다. 붓 터치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내가 강조한 인물 주변을 특히 꼼꼼하게 살펴주었다. 이십여 분간 관찰을 마친 그는 그림 오른쪽 상단과 하단 모서리에서 복원 흔적이 다량 검출되었고 납 성분을 함유한 물감과 시아노아크릴레이트 계열 접착제의 마모 정도로 보아 최소 12년에서 길게는 18년 사이에 마지막 복원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는 소견을 내놓았다. 나는 가운데 인물의 실루엣이 정교하게 뜯겨나간 것처럼 보이지 않느냐고 묻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복원 전문가가 도구를 챙겨 전시실을 빠져나가고 난 뒤에도 한참 그곳에 머물렀다. 어쩌면 다시는 이곳을 찾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갤러리를 찾아서」를 한 번 더 봐야겠다는 마음이 생긴 건 한국에서 온 안부 메일에 답신을 보낸 그날 밤이었다. 나는 어둠 속에 나부끼는 눈발을 받아내며 공원을 지났다. 마침 야간 개장이 있는 날이었으므로 오후 여섯 시가 훌쩍 지난 뒤 전시실을 찾았다. 다른 작품을 빠짐없이 둘러보고 그림 앞에 선 시각은 오후 아홉 시. 중산모를 쓴 남자와 대면했다. 이따금 관람객이 오갈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선배에게 그림이란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문은 아니었을까. 그 문을 통과하느라 이름도 잊고, 신분도 잃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림을 바라볼 때, 세상의 모든 색이 쏟아져 나와 자신을 잡아채는 그 초현실적인 순간을 가만히, 때로는 춤을 추며 기다렸던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반면 내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고 이내 폐관을 알리는 음악이 흘렀다. 쇼팽의 곡 「화려한 대왈츠」였다. 우연이었을까? 나는 연주를 좀 더 듣고 싶어서 느린 걸음으로 건물을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와 미술관 주변 공원을 산책했다. 이름 모를 수학자와 작곡가, 그리고 레닌의 동상이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진 커다란 공원이었다. 한 바퀴를 돌아 미술관이 보이는 모퉁이에 다다랐을 때 신관 건물에 어스름한 불빛이 드는 것을 보았다. 화랑이 있는 2층 창문에 은은한 빛이 맺혀있었고 굳게 닫힌 창문 뒤로는 흰색 암막 커튼이 쳐져 있었다. 나는 신관 쪽으로 몇 걸음을 더 옮겼다. 커튼 한편에 가느다란 실루엣이 보였다. 아주 얇고 희미한 얼룩이었다. 그 얼룩은 옆 창문으로, 그리고 다시 가까운 쪽 창문으로 천천히 움직이며 부드러운 곡선을 만들었다.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동안 나는 말없이 그곳에 서 있었다. 한참 후 숙소로 돌아오는 길, 눈 쌓인 공원에 점선처럼 그어진 발자국을 바라보며 이 밤의 일을 모두 그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