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 이후에 비로소 나를 선택한 밤
그녀는 오랫동안 잘 살아왔다고 믿었다.
가정이 있었고, 회사를 키웠으며, 맡은 역할에서 물러선 적이 없었다. 앞으로 가는 것이 곧 사는 일이라고 여겼고, 멈추는 일은 실패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 몸이 먼저 멈췄다.
예고 없이 찾아온 아픔 앞에서 그녀는 속도를 잃었다. 병실의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 있는 시간 동안, 그동안 쌓아온 것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계약, 숫자, 일정, 사람들. 걱정의 전화는 이어졌지만, 대부분은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괜찮아지면 언제 다시 일할 수 있는지, 공백은 얼마나 될지, 회사는 버틸 수 있는지...
그제야 알게 되었다.
자신을 향한 말들 속에, 정작 자신은 없다는 것을. 사람들은 그녀의 안부보다 그녀의 역할을 먼저 떠올리고 있었다. 서운함보다는 묘한 공허가 먼저 찾아왔다. 오래 붙들고 살아온 것들이 한순간에 허상처럼 느껴졌다. 그동안 무엇을 위해 이렇게 단단히 버텨온 걸까, 그 질문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몸은 회복되고 있었지만 마음은 막혀 있었다.
앞으로 나아갈 힘도, 이전으로 돌아갈 용기도 나지 않았다. 그때 그녀는 결심했다. 거창한 변화가 아니라, 아주 작은 선택부터 해보기로. 마음에 드는 립스틱 하나를 샀고, 오래 미뤄두었던 머리 스타일을 바꿨다. 정해진 시간에 운동을 하고, 하루의 끝에는 책을 몇 쪽이라도 펼쳤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변화는 아니었다. 처음으로 자신에게 허락한 시간이었다.
신기하게도 마음이 조금씩 가벼워졌다.
세상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 아픔은 여전히 남아 있었고 두려움도 사라지지 않았지만, 더 이상 삶 전체를 덮고 있지는 않았다.
깨진 틈 사이로 공기가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오래전에 읽었던 니체의 문장이 문득 떠올랐다. 깨진 틈이 있어야 빛이 들어온다. 그 문장은 그날 밤, 유난히 오래 머물렀다.
그날 그녀는 루미의 의자에 앉았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지나가다 불빛이 켜진 창과 그 안쪽의 의자가 눈에 들어왔고, 무엇에 이끌린 듯 문을 열었을 뿐이다. 의자에 앉자 몸이 먼저 반응했다. 긴장이 풀리며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찾아왔다.
루미는 말하지 않았다.
날개를 접은 채,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조용히 머물러 있었다. 그녀가 무엇을 결심했는지 묻지 않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말하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녀가 스스로에게 돌아오는 시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잠시 후, 그녀는 책 한 권을 펼쳤다.
내용이 중요하지는 않았다. 페이지를 넘기는 손길이 느려졌고, 호흡이 고르게 이어졌다. 아픔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더 이상 삶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지금까지 잘 살아왔다는 사실과, 앞으로 더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루미는 그 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삶이 완전히 달라지는 순간은 아니었다. 다만 방향이 조금 달라진 밤이었다. 아픔을 끝으로 만들지 않고, 출발점으로 삼기로 한 사람의 얼굴은 이전보다 덜 단단했지만, 대신 한결 부드러워 보였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픔은 끝이 아니라, 나에게로 돌아오는 가장 솔직한 입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