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시끄러운 고독 _ 보후밀 흐라발
책을 품어 본 적이 있는가.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이 내 일부가 될 때까지 품어 본 적이 있는가.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 속 주인공 한탸는 35년 동안 지하의 폐지 압축기 앞에서 살아왔다.
그가 매일 마주하는 건 버려진 책과 종이, 그리고 그것들이 압축되어 사라지는 소리다.
하지만, 한탸에게 이 일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었다.
책을 안고, 만지고, 그 속 문장을 가슴에 새기는 자신만의 '의례'이자 '삶의 방식'이었다.
한탸의 고독은 비어있는 고립이 아니라, 수많은 문장과 사유가 가득 차 부딪히는 '시끄러운 고독'이었다.
그리고 그 고독 속에서 그는 세상과 자신을 분명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책을 품는 사람
한탸는 책을 읽는 사람이 아니라, 책을 품는 사람이었다.
"잠시 책을 가슴에 껴안고 그 차가운 감촉이 내 몸을 타고 주웠다."
책은 그의 가슴속에서 샘물처럼 사유를 흘려보냈고, 마치 어머니가 아이를 품듯, 그는 책을 꼭 껴안았다.
그에게 책은 지식의 저장소를 넘어 인간의 정신과 존엄이 응축된 결정체였다.
책과 하나가 된 존재
세월이 흐르며 한탸는 책과 자신을 구분하지 않게 된다.
책 속의 문장과 자신의 기억이 뒤섞여, 어느 것이 내 생각이고 어느 것이 책에서 읽은 것인지 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책은 단순한 사물도, 읽고 지나가는 대상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가슴에 남은 체온과 같은 것이었다.
한 권 한 권이 그에게는 한 사람의 삶이었고, 그 삶이 압축기에서 사라질 때마다, 자신의 일부가 잘려나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책이 찢기고 구겨질 때, 그는 마치 자신이 함께 구겨지고 압축되는 듯한 감각을 받았다.
그래서 책의 운명은 곧 그의 운명이었다.
그가 책을 지키는 일은 곧 자신을 지키는 일이었고, 책과 자신은 더 이상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의 존재가 되어 있었다.
고립 속에서 지킨 성소
이 이야기가 쓰인 1970년대 체코슬로바키아는 '프라하의 봄' 이후 강력한 검열과 사상 통제의 시기였다.
많은 지식인이 망명길에 올랐지만 흐라발은 남았다.
그리고 한탸 역시 지하라는 '내부의 망명' 속에 머물렀다.
그곳에 서면 그는 자유롭게 책을 읽고 사유하며, 체제의 시선이 닿지 않는 작은 성소를 지켜냈다.
새로운 시대와의 충돌
그러나 시대는 변했다.
새로운 설비와 인력이 들어오면서 한탸의 느리고 사적인 의례는 '속도와 효율'의 논리에 밀려났다.
그에게 적응은 곧 자기부정이었고, 그가 지켜온 방식이 사라진다면 자신도 함께 사라지는 것이 당연했다.
마지막 의식
결국 한탸는 압축기에 몸을 넣는다.
"이제 완전한 미지의 세계로 진입한다."
그는 이 순간을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책과 하나가 되어 완성되는 의식처럼 받아들였다.
"책의 단면이 내 늑골을 뚫고 들어 온다. 입에서 비명이 새어 나온다."
그의 몸과 책은 물리적으로 하나가 되었고, 그것은 절망이 아니라, 끝까지 함께하겠다는 고요한 결심이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이 소설은 체코의 한 시대를 담았지만, 그 질문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깊게 닿는다.
우리는 속도와 효율의 시대를 살고 있다.
더 빠르게, 더 많이, 더 값싸게 - 이것이 세상의 요구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는 나만의 방식, 나만의 의례, 나만의 속도를 잃어버리고 있지 않은가?
한탸가 지켜온 것은 단지 책이 아니라, 그 책을 대하는 태도와 가치였다.
그것은 그의 존재의 근거였고, 그것을 잃는 것은 곧 자신을 잃는 일이었다.
고독이 나를 채울 때
한탸에게 고독은 비어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버려지는 책의 울음, 압축기의 굉음, 그리고 책 속 문장이 속삭이는 소리가 그의 가슴 안에서 부딪히고 메아리쳤다.
그 고독은 텅 빈 방의 침묵이 아니라, 수많은 목소리와 사유가 뒤섞인 뜨거운 공간이었다.
그 속에서 그는 자신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과 거리를 둔 그 시간 속에서만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무엇을 놓아야 하는지가 선명해졌다.
고독은 그를 고립시키는 감옥이 아니라, 그의 생각과 믿음을 단단하게 빚어내는 내부의 작업실이었다.
우리에게도 그런 고독이 필요하다.
휴대폰을 끄고, 사람의 목소리를 잠시 멀리한 채, 나를 채우는 생각과 감정의 결을 끝까지 따라가 보는 시간.
그 고독이 나를 가득 채울 때, 비로소 나는 내가 끝까지 지키고 싶은 것을 본다.
"세상은 여전히 시끄럽다.
그러나 그 시끄러움 속에서만 들을 수 있는 고독이 있다.
그 고독이 시끄러운 이유는, 그 안에 당신이 끝까지 지키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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