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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림 Aug 27. 2022

관계를 저버린 자는 부끄러움을 모른다

20년 지기에게 사기당하고 살기 위해 선택한 감정 재단

종이인형의 옷을 만든 적이 있는가? 흰색 도화지 위에 종이인형을 놓고 인형의 몸을 따라 옷을 그린다. 티셔츠도 그리고, 치마도 그린다. 종이인형을 거둬내고 가위로 조심조심 그려 놓은 티셔츠와 치마를 오린다. 조금도 삐뚤어지지 않고 원하는 인형 옷이 완성된다.


도화지에 그린 종이인형의 옷은 완벽하게 재단하면서 왜 내 머릿속의 생각은, 내 가슴속의 마음은 재단이 되지 않는 걸까? 정신도, 마음도 가위로 종이를 오리 듯 재단할 수는 없을까?


20년 인연으로부터 사기당하다

오랫동안 함께 일했고, 개인사며 가정사며 모르는 것 없을 정도로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아는 후배였다. 후배의 제안으로 투자했다가 현금 4천만 원을 날리고, 10억이 넘는 빚더미에 앉았다.

10억 넘는 빚이 생긴 건 그녀 탓은 아니다. 적어도 실체가 있는 투자였으니까. 그녀가 소개했지만 선택은 내가 했다. 내 탓이다. 그러니 내가 짊어져야 한다.


하지만 4천만 원은 다르다.

그녀가 소개한 투자는 소위 말하는 다단계였다. 현금을 송금하고 이틀 뒤 그녀의 윗 단계라는 사람이 전화를 걸어와 다른 사람을 데려오라고 했다. 그때서야 아차 싶었다. '이거 다단계인가요?'라고 멍청하게 물었다. 그 사람은 아주 자랑스럽게 '후배도 당신을 가입시키고 700만 원에 가까운 수수료를 받았으니 다른 사람을 데려오라'라고 했다.

후배에게 전화해 “이거 다단계니?”라고 묻자 그녀는 당당하게 말했다. “나는 다단계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

이 다단계 회사는 3주 만에 문을 닫았다. 나는 4천만 원을 날렸고 그런 나에게 그녀는 코인에 투자해 회복하라며 유튜브 채널을 추천했다.


이 사람이 내가 20년 넘게 알던 그녀가 맞나 싶었다. 하루에도 한두 번 전화를 하고 수시로 얼굴을 보며 온갖 이야기를 나누던 가장 친한 지인...

사람들은 “사기꾼에게 걸렸다”라고 말했지만 나는 믿지 않았다. 후배를 믿었고 후배와 함께한 20년 세월을 믿었다. 하지만 그리 오래지 않아 그녀의 본모습을 알게 됐다.


믿었던 사람의 밑바닥을 본다는 것은...

하루에도 한두 번 전화하던 후배 이 일 이후 한 달이 넘도록 연락하지 않았다.

나를 다단계에 가입시키고 돈을 챙겼다는 사실이 공개되어 민망해진 듯했다. 

그렇게 연락 없이 얼마쯤 지났을 무렵, 당시 나는 그녀에게 얼마간의 돈을 빌려주었던 터라 돈을 돌려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달 만에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돈을 갚으라고 말하자, 그녀는 화를 내며 돈이 없다고 했다. 자기를 못 믿어서 돌려 달라고 한다며 한 푼도 빼놓지 않고 갚을 테니 갚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녀를 내가 알던 옛날의 그녀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녀의 변화가 너무 무서워 제대로 답도 못했다. 나는 말을 더듬거렸다. 누군가 우리의 통화를 들었다면 내가 돈을 빌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녀는 어디서 그 큰돈을 당장 구하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서 말했다. 너를 믿고 그 큰돈을 빌려준 나도 있다.

그리고 지금 당장 갚으라는 것도 아니고 6개월 내에 갚아 달라고 했는데 도대체 얼마를 더 기다리면 갚을 수 있는 거니...


나는 그녀의 남편과도 잘 아는 사이다. 그녀가 연애하고 결혼할 때부터 봐 왔다. 그녀는 내가 혹시 남편에게 연락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던 듯 "남편한테 말해봤자 그 사람은 한 푼도 안 갚아 줄 거야"라고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내심 찜찜했던지 6개월 후에 돈을 갚겠다고 답이 왔다.


그런데 돈을 갚겠다날, 그녀는 자기가 빌린 돈은 000원이 아니라 000원 보다 500만 원 적은 XXX원이라며 돈을 다 받으려면 000원을 빌려주었다는 증빙을 하라고 문자를 보내왔다.

평소 '내가 빌린 돈이 000원이지?"라고 말했던 그녀였다. 그런데... 이렇게 한 입으로 다른 말을 하는 자신이 부끄럽지 않을까?

그녀에게 몇 년에 걸쳐 수차례 돈을 빌려주었기에 통장을 정리해도 돈을 맞추기 어렵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증빙하지 못하면 그녀는 500만 원을 덜 갚아도 되니 본인으로서는 득 되는 거짓말이었다.


나는 너무 화가 났고 그녀에게 무척 실망했다.

그 분노는 몇 년동안의 통장 내역을 찾아 빌려 준 돈이 000원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게 만들었고 그녀는 그제야 어쩔 수 없이 돈을 갚았다.

그녀는 나를 골탕 먹이고 싶었던 것 같다. 어차피 깨진 관계, 곱게 돈을 갚기 싫었나 보다.


20년 인연은 그렇게 '지저분하게' 끝났다.

인연이란 그렇다. 관계를 버리기로 마음먹으면 창피한 일도, 부끄러울 것도 없다.

자기 몫을 조금이라도 더 챙기는 것, 상대를 괴롭히는 것이 먼저다.  


나는 그녀가 무섭다. 사람이 무섭다.  방 안에 처박혀  히키코모리처럼 살았다. 가만히 있다가 헛구역질을 하기 일쑤였다.

내가 이렇게 사는 동안 그녀는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아주 잘 살고 있다. 

돈이 없어 못갚는다고 소리치던 그녀는 6개월 뒤 늘 소망하고 꿈꾸던 청담동으로 사업체를 확장이전했다.

그녀의 SNS에는 화려한 사진이 넘쳐난다. 그녀는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사업체를 운영하는 '대표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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