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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림 Aug 27. 2022

미워할 용기

용서되지 않는다면 실컷 미워해라

방 문을 닫으며 마음의 문을 잠그다

나에게 사기 친 20년 인연 후배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사업을 하며 아주 잘 살고 있다.

후배가 성공한 사업가로 승승장구하는 동안, 나는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닫았다. 음식을 먹지 못했고 잠도 자지 못했다. 방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커튼도 열지 않은 깜깜한 방에서 후회하고 또 후회하고, 그녀는 잘 사는데 나만 이렇게 된 것이 억울했다. 자다가 악몽에 시달리며 눈을 뜨기도 했다.


얼마의 날들이 지났을까... 이자 미납 독촉을 받았다. 나는 돈을 벌어야 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숨만 쉬어도 매월 500만 원의 이자를 내야 했으니... 죽을 수도 없다. 내가 죽으려고 하면 아마도 은행 직원이 나를 찾아내 살릴지도 모른다. 돈 갚으라고...

나의 머릿속은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했다.

오랫동안 두통으로 신경과에 다녔던 탓에 잠을 못 잘 경우를 대비해 받아 놓은 수면제도 꽤 남았다. 수면제를 손바닥에 쏟고 한참을 본 적도 있다.


내가 수면제를 털어 넣을 때, 나에게 사기 친 그녀는 청담동에서 브런치를 먹을 것이다!


살기 위해 선택한 감정 쓰레기 오려내기

어느 날, 살기 위해서는 내 감정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방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빚을 가족에게 남기고 죽을 수는 없으니까!

그때 떠오른 것이 감정 재단이다.


어렸을 때 종이인형 옷을 만든 적이 있다. 도화지에 종이인형을 놓고 몸을 따라 옷을 그렸다. 그리고 가위로 조심조심 옷을 오려냈다.

나의 부정적이고 우울한 감정을 종이인형의 옷을 오리듯 깨끗하게 잘라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였다.

나쁜 기억을 지우면 지운 자국이 남지만, 오려내면 깔끔하게 죽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래서 나의 감정을 매일매일 재단하기로 했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에 맞춰 조심조심 감정을 오려 내기로 했다.


용서되지 않는다면 마음껏 미워하라

나는 매일 한 가지씩의 감정을 정리하기로 했다. 첫 번째로 마주한 감정은 미움이다.

후배에 대한 미움, 잘못된 선택을 한 나에 대한 미움.

좋은 생각만 하고 좋은 말을 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긍정적인 조언도 최악의 상황에서는 효과 있는 처방약이 되지 못한다.

머릿속에 부정적인 생각이 가득할 때는 '그것'을 실컷 미워하는 수밖에는 없다. 울다 울다 지치면 눈물샘이 마르는 것처럼 미워하는 마음도 말라 버리는 순간이 온다. 물론 그 한계점에 이를 때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고 마음이 괴롭다. 무언가를 미워한다는 것은 그만큼 에너지를 쏟는 일이라 본인도 힘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참고 억제하는 것 역시 힘든 일이다. 둘 다 힘든 일이라면 차라리 욕하고 쏟아내는 게 낫다.


마음에 부정적인 감정이 가득한데 긍정 명언을 듣고, 긍정 일기를 쓴다고 나아질 리 없다. 나는 나의 마음을 가득 채운 미움을 밖으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냥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이면지 뒤에 '거지 같은' 내 마음과 그녀에 대한 솔직한 감정을 글로 적었다. 글씨를 쓰기도 했고 의미 없이 낙서를 하기도 했다. 사람을 그리기도 했고 동그라미나 네모처럼 도형을 그리기도 다.


이런 낙서를 한다고 정신이상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감정을 쏟아내는 방법은 다양하다. 친구와 몇 시간씩 수다 떨며 속상했던 일을 털어놓기도 하고, 술에 잔뜩 취하기도 하고, 일기장 가득 누군가의 욕을 적기도 한다.

한참을 미워하고 욕하고 또 욕하고 나면 지칠 때가 다. 망각의 단계로 들어선 것이다. 지금까지는 기억하고 곱씹었다면 이제 잊어버릴 시간이다.

진정한 용서란 없다. 그저 잊어버리는 것이다.


나는 아직 그 후배에게 화 나 있고 그녀가 밉다.

용서하기 위해서는 나에게 상처 준 상대, 나에게 상처 준 사건이 일어난 과거를 더듬어야 하고, 당시 나의 선택을 후회해야 하는 자기 비난의 시간을 겪어야 한다. 때문에 누군가를 용서하려면 나의 잘못된 선택과 마음을 먼저 용서해야 한다.


나는 그녀를 미워하는 만큼 나의 선택과 욕심을 미워하고 있다.

나는 아직 자기 비난 중이다. 언젠가는 망각의 강을 건너 나와 그녀 모두를 용서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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