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과 책 - L에게

by 북극성 문학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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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과 책


안녕 L,


편지를 쓰는 오늘이 마침 너의 생일이야. Herzlichen Glückwunsch zum Geburtstag!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 스위스 날씨는 어때? 덥지도 춥지도 않은 선선한 날씨였으면 좋겠다. 한국은 지금 가을이야. 아직 좀 습하긴 한데 아침에 출근하려고 집을 나설 때 공기가 달라졌음을 느꼈어. 시원한 바람. 드디어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온 거야.


네가 이맘때쯤 한국에 왔다면 좋았을 텐데 싶더라. 작년에 광화문역에서 너를 처음 본 날이 떠올라. 역사박물관까지 도보로 10분도 안 걸렸는데 너의 티셔츠는 이미 땀으로 젖었고, 미니 선풍기로 열을 식혀야 했지. 이렇게 더운 날씨를 좀처럼 경험해 보지 못했다고 말했어. 나중에 널 보러 스위스에 가보니 그 말이 이해 가더라. 한평생 스위스 날씨에 익숙해 있다가 한국의 불타는 여름을 만났으니 놀랄 만도 했겠어.


시원한 냉면. 너의 숙소에 가서 함께 먹은 냉면은 참 맛있었어. 그날 우리는 계획했던 경복궁이나 절 방문 일정은 다 취소하고 열 식히는 데 집중했지만 시원한 에어컨 아래에서 도란도란 이야기 나눈 그때의 기억이 참 좋아. 화상통화나 메시지로만 이야기하다가 처음 만난 날이기도 하니까. 냉면 먹고 설빙 가서 망고 빙수를 먹고, 머리 저릿할 정도로 시원함을 마음껏 누리다가 헤어졌지. 돌아가는 길은 더위와 싸워야 했지만.


널 처음 본 계절이 여름이라 여름 이야기를 잔뜩 했네. 너는 벌써 한국어를 배운 지 7년이 훨씬 넘어가서 억양이나 구사하는 단어도 수준급이기에 번역기의 도움 없이 한국어로 일단 편지를 보내본다. 한국어 숙제를 준 것 같은데 이러면서 언어 실력도 늘지 않겠어? 대신 네가 답장을 독일어로 해도 나도 겸허한 마음으로 열심히 읽어볼게.


봄, 여름, 가을, 겨울. L 너는 어떤 계절을 가장 좋아해? 일단 여름은 아니겠지. 겨울은 너무 추우니 봄과 가을 아닐지 추측해본다. 이번 제철편지의 계절은 그중 가을로 골라봤어.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니까!


취리히에서 사서로 일하는 너라면 이 말을 더 잘 이해하겠지. 나는 가을에 태어나서 그런지 가을이 가장 좋아. 나도 책을 좋아하고 출판 쪽에서 일하고 있어서 그런가. 알록달록 단풍을 보면 괜히 마음이 몽글몽글해지고 진부하지만 트렌치코트 입고 벤치에 앉아서 책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해.


아니면 돗자리 깔고 공원에 앉아 있어도 좋아. 돗자리에 낙엽이 하나씩 툭 툭 떨어질 때 들리는 소리 알지. 그 소리 좋아.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 선선한 바람이 쑤욱 들어오지. 내 눈엔 안 보이지만 다람쥐나 청설모가 도토리를 모으고 있는 어느 산의 풍경. 토독토독 도토리 떨어지고 부지런하게 그걸 주워 담고 있을 동물들을 떠올리며 나는 한 장 한 장 책을 넘겨.


하얀 종이 위 검은 글자를 도토리 삼아 나도 성실하게 글자를 모아본다. 작고 깜찍한 다람쥐와는 거리가 멀지만 가을에 책을 열심히 읽는 우리는 성실한 안경 다람쥐라는 별명 정도는 붙여볼 수 있어.


네가 일하는 도서관 풍경이 떠올라. 너의 초대 덕분에 견학 온 어린이처럼 도서관 사무실도 방문하고 서가도 구경했잖아. 지하까지 책이 가득한 곳에서 일하는 너에게 책은 낭만적으로만 볼 수 없는 대상이겠지만, 날마다 샌드위치를 싸 들고 일하러 가는 장소가 크고 웅장한 도서관이라 부럽기도 해.


겨우 이틀간의 스위스 여행이었지만 그간 가본 여행지 중에 손에 꼽을 정도로 좋았어. 친구가 일하는 곳에 가볼 수 있어서 더 좋았던 것 같아. 도서관에 있던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종이에 직접 쓰는 대출증이 모인 오래된 나무 서랍장이 종종 생각이 나. <채식주의자>, <불편한 편의점>이나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같은 한국 작품 번역서도 있어서 신기했고.


가을이 오면 네가 일하는 도서관 사무실의 큰 창이 온통 주황색으로 물들겠지. 백조와 거위가 둥둥 떠다니는 근처 강가에도 가을이 찾아와 더 아름다울 것 같아. 그 거리를 날마다 걸으며 무슨 생각을 해? 데이식스나 다른 아이돌 노래를 들으며 출근하나. 도서관 여러 공간 중에 네가 가장 편안하게 가을 풍경을 감상하는 곳은 어딘지도 알고 싶어.


편지를 쓰기 전부터 가을에 어울리는 어떤 한국 책을 추천해 주면 좋을까 고민했어. 우리가 대화 나눌 땐 보통 연예인 이야기나 사는 이야기, 고민 등을 이야기하니까 책 이야기는 거의 안 하긴 했지. 우리의 직업과는 무관하게 말이야.


앞서 말했듯 가을엔 어떤 책을 읽어도 다 좋아서 고민이 깊어졌어. 시집을 추천해야 하나, 아니면 소설, 수필, 평론집? 그러다가 어떤 책을 읽어도 다 좋은 가을이라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품을 소개해 주고 싶다는 결론에 이르렀어.


양귀자 작가의 <모순>이라는 작품이야. 오래전에 출간된 책인데도 우리 동네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매대에서 내려오질 않아. 주인공은 안진진이라는 여자애야. 어느 날 안진진은 아침에 일어나면서 눈물이 왈칵 났는데, 삶의 부피가 겨자씨만큼 작아서 어떻게든 늘려야겠다고 다짐했대. 겨자씨만큼 작다는 표현이 인상적이지.

안진진과 같은 나이인 스물다섯에 이 책을 처음 읽었어. 어떻게든 분투하며 삶의 부피를 늘리고 싶었던 시기라 공감이 갔어. 십 대의 불안한 시기를 보내고 나면 이십 대는 좀 더 편할 줄 알았는데, 삼십 대에 진입하는 지금도 불안은 떨어지질 않네. 그때와 지금, 얼마나 삶의 부피를 늘렸나 하면 글쎄. 크고 작은 여러 일을 겪었지만 얼마나 넓어졌는지 말할 수 없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싶기도 하네.


불안감도 마찬가지야. 당장 오늘도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없고, 어떤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 몰라. 불안을 없애는 게 아니라, 불안을 잘 다독이며 나아가는 일을 배워야 하더라. 요즘 스스로 마음을 토닥토닥 해주는 일도 늘었어. 아침마다 괜찮아, 오늘 하루도 잘 지나갈 거야 되뇌면서.


안진진은 책 결말쯤 분투의 과정을 다 겪어내고 어떤 선택을 해. 그 선택이 맞는 선택인지, 그렇지 않은 선택인지는 알 수도 없고, 선택에 옳고 그름도 없지만 어쨌든 결정했음이 중요한 것 같아. 그게 우리가 가을에 기대하는 바가 아닌가 싶고. 무르익은 열매를 따는 시기.


내 또래 여자애지만 안진진은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이모뻘이지. 1980년대 시대 배경이지만 2025년, 지금을 살아가는 L 네가 읽어도 공감할 요소가 있어. 언젠가 책을 읽고 나한테 후기를 들려주면 좋겠어.


우리가 선택하는 모든 것을 다 응원하고 싶어. 그 선택에서 무엇이든 배울 기회가 있음은 큰 행복이고 축복 같아. 나는 성숙한 인간은 아니라 상처받으면 데구루루 구르면서 아파하고, 상처 줬던 상황이나 사람을 원망하기도 하고 내가 누구에게 줬던 상처, 실수가 너무 부끄러워서 땅굴 파고 그렇게 지내지만, 배울 수 있음에 감사하며 하루를 또 보낸다.


내가 갈망했던 바와 선택이 달라서 좀 모순적으로 살아가면 어때. 삶은 원래 모순으로 가득 차 있는걸.


L, 가을을 온전히 누리길 바라. 이번 가을은 남 부럽지 않게 누리기를 다짐했어. 나무들이 나 좀 봐주세요, 하고 뽐내는 가을이 왔으니 차곡차곡 담고 있던 모든 것들 다 발산하고, 여행도 많이 다니고, 막 돌아다닐 거야. 10월에는 허수경 시인의 고향 진주에 가서 추모회에 참석할 거고, 5년 전부터 가고 싶던 전주의 칵테일바에도 혼자 들러 보게.


마음 평온한 순간엔 눈을 감고 네가 내어주었던 스위스의 다락방을 떠올릴게. 폭신폭신한 이불과 은은한 주황빛 조명. 우리가 다시 만나려면 적어도 1년은 지나야겠지만, 가을의 풍경 속에서 틈틈이 너를 떠올릴게.

L, 다시 한번 생일 축하하고 안온하기를.


너의 성실한 안경 다람쥐 친구 S가.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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