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과 영화 - K에게

by 북극성 문학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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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과 영화


안녕하세요, K.


이 편지는 독일어로 번역해서 반말(duzen)로 보내겠지만, 한글로 쓸 땐 존댓말이 더 편해요. 겨울 편지를 보낼 준비를 하다가 우리가 주고받은 메일을 다시 확인했는데요. 총 32통이더라고요. 2021년 7월에 처음 만났으니 4년간 꽤 자주 서로의 일상을 공유했네요.


K, 사실 이렇게 편지를 쓰는 일 자체가 새삼 신기해요! 21년 N 아동 책방에 방문해서 책방 직원인 K을 제가 인터뷰하고, 그걸 계기로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왔다는 게 보통 일은 아니니까요. 정말 귀한 인연을 얻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작년엔 K 집에 머물며 손님방에서 일주일 동안 지낼 수도 있었는데요. 그때 제게 “너는 우리 집 셋째 딸이야. 편하게 머물러.”라고 말해주셨지요. 흔쾌히 방을 내어준 K 덕분에 저는 꿈이었던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을 실컷 구경할 수 있었어요. 꿈 같은 휴가를 보냈습니다.


제철 편지라는 콘셉트로 K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어 기뻐요. 겨울이라는 계절에 어울리는 영화를 소개해드린다고 미리 말씀드렸지요? 계절별로 좋아하는 영화를 우선 떠올려봤습니다. 봄에는 리틀 포레스트(임순례, 2018), 여름에는 안경(오기가미 나오코, 2007), 가을에는 중경삼림(왕가위, 1994), 겨울에는 캐롤(토드 헤인즈, 2015)이 떠올라요. 피부로 느껴지는 계절보다 더 생동감 있는 계절을 누리고 싶을 때 영화를 꺼내 보곤 해요. 미디어 속 계절은 때론 실제보다 아름다워 보여요.


<캐롤>과 함께 겨울에 자주 보는 한국 영화가 있어요. <윤희에게>라는 영화에요. 영화가 개봉한 이래로 1년에 한 번씩은 꼭 보곤 해요. 다 보고 나면 자주 써서 헤진 장갑을 끼고 눈사람을 만들고 싶기도 하고 영화 촬영지인 일본의 오타루로 여행도 가고 싶어져요. 이쯤에서 잠깐 영화 줄거리를 소개해드릴게요.


윤희와 윤희의 딸 새봄은 윤희에게 어느 날 도착한 편지 한 통을 계기로 여행을 떠나요. 엄마이자 급식 조리원으로 살아온 윤희는 자신에게 편지를 보낸 그 대상을 만나기 위해 용기를 내요. 무려 20년 만에요. 눈이 펑펑 내리는 낯선 여행지에서 진심과 진심이 닿는 순간을 숨죽여서 지켜보게 하는, 그런 영화에요.


웨딩드레스를 입은 두 사람. K가 제게 친척 사진을 보여줬을 때, 사진 속 행복해 보이는 미소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어요. 결혼사진은 어느 정도 긴장한 얼굴을 감추기 어려울 듯한데, 자연스럽고 편안한 얼굴을 보니 기분이 좋았어요. 아이를 기다리고 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건강히 출산하셨는지도 궁금하네요.


집안의 반대로 인해, 자신으로 살기 두려운 마음이 들었던 어린 윤희가 중년 여성이 된 시간. 열심히 살면서도 때때로 찾아오는 공허. 살며시 그 마음을 추측해봐도 제가 온전히 알기가 어렵겠죠. 윤희가 한겨울 꽁꽁 언 고드름처럼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을 마음을요.


두 사람의 진심이 통하는 순간 자체가 값지고 정말 귀하잖아요. 영화를 보면서 제게도 그런 순간이 오면 주저하고 망설이더라도 또 용기 내기를 선택해야지, 다짐했어요. 그러고 보면 일, 사랑, 삶 모두 안 어려운 게 없어요. 주어진 상황 속에서도 행복을 찾아내고야 마는 대찬 마음. 노력해야 할 게 있다면 그것뿐.


서툴렀던 사랑 경험담을 K에게 털어놓았을 때 보내주신 답장도 오늘 다시 살펴봤어요. 이별은 거의 언제나 아픈 법이야, 너는 똑똑하고 용감한 젊은 여성이고 깊이 슬퍼할 때만 빼면 유머 감각도 보유했어. 하지만 지금은 잘 느끼지 못하더라도 이 시기를 이겨내고 나면, 분명 더 강해질 거야. 이런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편지를 받아봤을 때의 뭉클함이 있었어요.


<윤희에게>를 볼 때, 저는 주인공 윤희보다는 윤희의 딸, 새봄의 시선에 더 몰입했어요. 아무래도 제가 엄마가 되어본 적 없고 딸의 입장으로만 지금껏 살아왔기 때문이에요. 새봄은 엄마의 삶을 마음 깊이 응원해요. 그래서 일본 여행도 추진했죠. 새봄에겐 본인이 갖지 않아도 되는 죄책감도 있었을 것으로 보여요.


더 빛나게 살아갈 수 있는 엄마가 자신을 양육하기 위해 포기한 무언가를 떠올리며 문득문득 괴로워했을 거예요. 있죠, K. 그건 제가 때때로 하는 생각이기도 해요. 나를 낳지 않았다면 더 자유로웠을까. 저뿐 아니라 부모와 자식 관계에서 어쩌면 다들 한 번쯤 떠올렸을 질문이 아닐까 싶어요.


회사 사무실에 엄지만 한 작은 식물을 두고 키운 적이 있어요. 일주일에 물 한 번만 줘도 된다고, 기르기 편할 거라고 꽃집 사장님이 추천해주셨는데 막상 데리고 오니 날마다 시선이 가더라고요. 물을 거르지 잘 챙겨주었으나 햇볕이 잘 안 드는 환경이라 나날이 시들시들해갔어요. 마지막 이파리까지 시들고 줄기만 앙상하게 남았죠. 하나의 생명을 기르는 것은 참 어렵구나 그때 다시 생각했어요.


으앙 울고, 말 안 듣고, 사고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는 또 자기 말이 옳다고 하고, 상처도 막 주고, 게다가 사춘기까지. 한 아이를 기르는 일에 쏟아부어야 하는 마음과 노동을 생각하면, 그 사랑의 크기가 얼마큼인지 가늠하기 어려워요.


새봄은 곧 스무 살. 그 마음의 크기만큼 윤희에게 돌려주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엄마가 나로 인해 불행하거나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일이 더는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겠죠. 그런 새봄의 바람처럼 윤희가 긴 시간에 거쳐 부정했던 자기를 다시 찾고, 스스로 존중해주는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서 기뻤어요. 긴 겨울의 시간이 끝나고, 마침내 윤희의 마음에도 봄봄봄.


슈투트가르트에 거주하시는 K의 어머니는 요즘 건강이 어떠신가요? 89세이시라 K의 도움이 많이 필요한 상태라고 들었는데요. 어머니가 아프면 딸인 K의 마음도 좋지 않고, 마음 단단히 먹고 강해지려고 거듭 노력하실 것 같아요.


K에게 어머니는 어떤 존재였는지도 알고 싶어요. 어머니에게 애틋한 마음이 있음을 알고 있기에, 어머니가 따듯한 사랑을 K에게 주셨겠다 하는 생각도 들어요. 전에 마인츠 시내를 함께 둘러볼 때 딸인 V에게 보낼 편지지를 구매하셨잖아요. 그것만 봐도 K가 얼마나 다정한 엄마인지, 또 어떤 사랑을 받고 자라오셨을지 그려지더라고요.


사랑을 주고받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 거듭해 깨닫고 있는데요. 사랑을 잘 표현하고, 잘 줄 줄 아는 사람이 참 멋져요. 그게 꼭 사랑을 받아봐야 줄 줄도 알 거야, 라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요. 사랑도 연습하다 보면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고 싶어요. 주는 것도, 받는 것도 모두 다요!


K, 작년 크리스마스를 맞이해 제가 보낸 한국 전통차는 저희 엄마가 강력하게 추천해서 보낸 선물이기도 해요. 엄마는 제가 선물 같은 일주일을 K 집에서 보냈으니, 뭐라도 보내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고 말씀하셨어요. K 집에 가져갔던 윷놀이 세트도 엄마의 아이디어에요. 언젠가 K과 저희 엄마가 인사할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제 사랑의 시작점인 엄마를 K에게도 보여드리고 싶어요.


겨울은 쌀쌀하고 춥고 그래서 방 안에 웅크리고 있다 보면 늘어지기 일쑤인데요. 그렇지만 어느 때보다 온기의 존재를 생각하고 더없이 고마워지는 때이기도 해요. K.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언제나. 지금 당장이라도 마인츠에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비행기 표, 연차 등 여러 현실적인 이유로 갈 수 없어서 속상해요.


다만 올해 겨울에도 용기를 주는 말들과 사랑의 표현들, 그리고 우리가 함께 지나온 시간 속에 빛나고 있는 등불 같은 따듯함을 떠올리며 당차게 살아갈 거에요. 눈 많이 내리는 겨울에도 각자의 나라에서 따듯하게 차 마시면서 건강하게 지내요. 많이 애정해요. 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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