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과 드라마 - I에게

by 북극성 문학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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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과 드라마


안녕 I,

우리 어제도 통화했지만 오늘은 편지를 보낸다. 네가 다니는 대학원이 지금 방학이라 다행이야. 네가 시험으로 더 바빠지기 전에 얼른 보내는 게 내 목표였어. 원래는 너한테 2주 전에 편지를 보내려고 했어. 막상 편지를 쓰려니까 엄청 막막한 거야. 제철편지 시즌 2로 4인에게 글을 보낸다면, 너는 꼭 거기에 포함하고 싶었거든.


왜냐하면 내가 사귄 외국인 친구 중에서 네가 가장 친구처럼 느껴져서야. 우린 나이 차이도 한 살 차이고, 교환학생으로 짧게 한국에 머무른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한국의 정서나 내 상황을 더 잘 이해한다고 생각했어.


이슬람교에 터키 배경이 있는 독일인. 토목공학과 대학원생으로 공부하느라 고군분투하는 중. 아주 단편적인 너에 대한 정보는 이렇지만, 출신이나 배경, 전공이 나와 완전히 다르더라도 마음의 거리가 가까울 수 있음을 너로 인해 배웠어.


한 페이지 훨씬 넘게 편지를 썼다가 다시 지우고 이 글을 새로 쓰는 중이야. 사실 편지를 쓰기 전만 해도, 나는 너를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막상 글을 쓰려니까 주저하게 되는 거야. 여러 주제로 독일어로 대화 나누지만, 100% 내용을 이해한 게 맞나 하면 잘 모르겠거든.


어제 통화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너 지금 이 말 이해한 거 맞아?”라고 네가 늘 묻잖아. 내 눈동자가 흔들리면 네가 그걸 보고 물어봐 주지. 나는 아이가 된 심정으로 “아니, 그게 무슨 뜻이야?”라고 말해. 그러면 천천히 말해주거나 쉬운 단어로 변경해서 의미를 전달하지. 그것도 안 되면 파파고로 한국어로 번역하거나.

그게 고마우면서도 때때로 움츠러들기도 해. 너의 말을 완전히 다 이해하기도 어렵고, 또 내 마음을 온전히 전하는 일도 어렵게 느껴져. 하고 싶은 말을 다 전할 수 있으면 정말 좋을 텐데. 그래도 손짓발짓 다 하면 의미는 전달되고, 무엇보다도 서로의 말을 귀 기울여 들으려는 노력이 우리 사이에 존재하기에 소통은 가능해.

종종 우리 통화할 때 네가 내가 이전에 했던 말을 기억해서 나의 근황을 다시 물어보면 속으로 좀 놀란다. 어쨌든 전달되었구나, 싶은 생각도 들고 세세히 내 말을 기억해 주고 있어서 감동도 받았어. 우리 할머니 건강을 물어봐 줘서 고맙더라고. 이 편지도 파파고의 도움을 받아 독일어로 번역해서 보낼 텐데, 온전히 뜻이 다 전해지지는 않겠지만 그냥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나오면, 어쨌든 이렇게 길게 보낸 걸 보니 얘가 날 좋아하기는 진짜 좋아하나 보다, 생각해 주면 고맙겠어.


편지를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느낀 점. 내가 독일어를 지금보다 유창하게 해서 너랑 대화가 잘 되었더라도, 나는 너를 100% 다 알 수는 없다. 또한, 너를 표현할 수 있는 정보를 내가 온전히 알고 있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네가 나한테 어떤 존재인지, 나는 너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예를 들어 너의 취미, 전공, 좋아하는 가수, 이상형, 최근 관심사, 요즘 걱정, 하다못해 가족 구성원 등 정보가 있잖아. 그 정보를 알고 있으면 너와 대화할 때 이야깃거리가 더 늘어나니 대화가 더 풍성해지겠지만, 사실 그런 세세한 정보를 모르던 시절에도 대화는 즐거웠어. 하나씩 알아가는 재미가 있었고, 나와 다른 삶을 사는 너의 이야기가 흥미로웠으니까.

내가 한국으로 교환학생을 올 때는 대학 마지막 학기라고 말했어. 내성적이라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걸 좋아하는데, 내면이 단단해지기를 바라서 도전하고 싶다고 했지. 언어를 잘 모르는데도 일단 시도해 보는 네가 멋지다고 생각했고 너의 한국 생활이 즐겁기를 응원했어.


너의 고양이 이름이 Muezza라는 것도 신기했어. 이슬람교에서는 고양이가 좋은 존재라는 것도 너를 통해 알게 됐지. 네가 건축학을 배우는 이유도 인상적이야. 고향에서 지진이 나서 많은 사람이 죽었고, 사람들이 죽는 것을 막는 방법을 연구하고 싶다는 말. 지금도 종종 생각나.


최근에 뮌헨에 있는 대학원에 진학한 것, 여름휴가로 터키에 다녀온 것, 헬스를 하고 있고,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는 정보들. 우리가 비록 예컨대 죽음이나 요즘 경제 동향 관련 이야기를 심도 있게 나누지는 못하더라도 나는 네가 어떤 꿈을 꾸고, 어떤 태도로 삶을 살아가고 싶어 하는지를 알고 있어. 기억을 되짚어보면서 그래도 내가 너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다고 다시 생각하게 되더라.


무엇보다 중요한 건 네가 계속 궁금하다는 거야. 너의 안부가 궁금하고 네가 할 선택과 너의 미래가 궁금해. 나는 이 호기심과 애정을 바탕으로 너와 인연을 계속 이어 나가고 싶어. 너에게 나도 문득 궁금해지는 사람이면 좋겠다.


편지 형식으로, 한국 콘텐츠를 나의 외국인 친구에게 소개하는 프로젝트이기도 하니 추천해 줄 드라마도 여러 후보로 계속 고민했어. 그러다가 아예 한 드라마 작가의 작품들을 소개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어. 시험 치느라 바쁜 네가 드라마를 볼 시간이 있을까 모르겠는데, 그런 와중에도 최근에 또 <케이팝 데몬 헌터스>도 재미있게 봤다고 했으니까 틈틈이 내가 추천해 준 드라마를 봐도 좋을 듯.


나는 임상춘 드라마 작가를 좋아해. ‘봄과 드라마’가 이 편지의 주제잖아. 이 작가 필명에 들어간 ‘춘’이 봄 춘이면 좋겠지만, 넉넉하다는 의미의 춘이래. 넉넉한 생각이라는 뜻이야. 봄 춘이 아니라 아쉽지만, 그래도 발음은 같다는 점을 한번 말해본다.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화제가 된 <폭싹 속았수다>(When Life gives You Tangerines)를 쓴 분이시고, <동백꽃 필 무렵>(When the Camellia Blooms), <쌈, 마이웨이>(Fight for My Way) 등 다수의 극본을 만들었어.


위에서 언급한 세 작품 다 봄을 떠올리게 해. <폭싹 속았수다> 포스터를 보면 제주도 유채꽃밭에서 두 주인공이 서 있어. 10대 시절 두 사람의 첫 뽀뽀가 이뤄지는 곳도 유채꽃밭이지. <동백꽃 필 무렵>은 바닷가를 배경으로 한 ‘옹산’이라는 허구의 지역에서 벌어진 사건을 추적하는 내용인데, 드라마 제목인 동백꽃은 우리나라에서 겨울에서 초봄에 피는 꽃이야. <쌈, 마이웨이>는 가진 거 뜨거운 피밖에 없는 청춘들의 꿈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거든. 완전 푸릇푸릇한 봄이 연상돼.


너가 한국 드라마랑 터키 드라마랑 비슷한 점이 있다고 했던 거 생각나. 최애 드라마로 내게 말했던 “Kurt Seyit ve Şura(세이트와 수라)”의 줄거리와 임상춘 작가의 드라마도 어느 정도 비슷한 점이 있어.


찾아보니 세이트와 수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원작이 있는 드라마더라. 러시아 혁명이 배경이고, 터키 남자와 러시아 여자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 배경이 다르다는 이유로 가족들이 허락하지 않지만, 여러 상황 속에서도 사랑을 위해 이스탄불로 도피하는 내용이더라고. 만국 공동의 관심사는 역시 사랑인가. 사랑 소재의 드라마는 참 여기저기서 많이 볼 수 있어.


<폭싹 속았수다>에서도 가난한 해녀 딸인 애순이와 그것보다는 비교적 부유한 집안인 관식이의 사랑을 반대하는 내용이 나와. <동백꽃 필 무렵>의 용식이는 옹산을 주름잡는 게장 가게를 운영하는 백두 할머니의 막내아들이야. 이 아들이 미혼모 동백이를 쫓아다니자 원래 동백이를 안쓰러워했던 백두 할머니는 아들의 짝으로는 반대하는 모습을 보여줘.


꼭 이런 사랑을 반대하는 내용이 아니더라도 드라마에서 갈등 장면을 꼭 필수인 것 같아. 그런데 drama의 다른 뜻은 극적인 사건이나 상황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잖아. 그래서 그런 갈등 요소가 안 들어갈 수 없는 거지. 내가 드라마를 보면서 몰입하게 되는 지점도 바로 갈등 요소 같아.


임상춘 작가는 한 개인의 삶에 스며든 불행이나, 재난같이 몰려온 사건들. 그리고 인물과 인물이 만나게 되며 벌어지는 갈등 같은 것 있잖아. 그걸 굉장히 따듯한 시선으로 보여준다.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애정이 있는 작가라고 느껴져. 불행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주인공에게 박수를 보내고, 끝내는 행복해질 거라고, 성실함을 차곡차곡 쌓으면 적금으로 돌려받을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 같아.

세상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보다는 이런 사람들이 더 많으면 좋겠어. 그리고 그런 사람이 만든 드라마를 보면서 각자의 삶에서도 조금 더 따듯하게 서로를 바라보면 좋겠다는, 생각해. 각박한 세상이니까. 그래서 임상춘 작가의 작품은 봄바람처럼 마음에 스며들고, 봄의 설렘도 함께 갖고 있어.


관식이 엄마도, 백두 할머니도 모두 각자 사연이 있고, 주인공들의 사랑을 방해했다고 해서 나쁘기만 한 사람이 아니다. 완전한 악역이 아니야. 전혀 이해 못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도 한번 헤아려볼 수 있는 것. 드라마를 보면 그런 걸 시도해 볼 수 있어서 좋아. 그리고 여러 사건 속에서 한 개인은 어떤 선택을 하는가. 그것도 주된 관심사이지. 아, 이 드라마에서는 주연뿐 아니라 조연의 서사도 탄탄해서 꼭 어디 살고 있을 것만 같다. 작은 역할을 맡은 사람들의 삶도 궁금해지는 거야.


나는 너의 선택과 너의 미래가 궁금하다고 했잖아. 드라마 볼 때도 마찬가지 같아. 이 주인공이 나아갈 길이 궁금해져. 계속 드라마를 한 화씩 보게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

누군가가 자꾸만 궁금해지는 것. 나와 정반대이거나 나와 조금 비슷한 면모가 있는 주인공이 어떤 선택을 해서 자기 길을 뚜벅뚜벅 걸어 나갈까. 나는 너의 드라마 같은 순간을 앞으로도 알고 싶어. 너에게 놓일 사건들을 네가 어떻게 헤쳐나가는지 옆에서 지켜보며 응원할게. 방학 잘 지내고 또 보자. 답장 기다릴게. 안녕. :)


너의 친구 S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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