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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차파우더 May 13. 2021

시작이란, 서재에서 책한 권을 꺼내는 일이다.

그만둔 게 아니라 시작에 멈춰 있었을 뿐이다.

책은 좋아하면서 독서를 안 하기에 무작정 문구점에 들어가 계획에도 없던 노트 한 권을 구입했다. 집에 오자마자 서재에 꽂여 있는 책들 중 서른 한 가지의 아이스크림을 고르는 것처럼 신중하게 둘러보았다. 서재라고 해봤자 '책을 쌓아뒀다'에 가깝지만 돈을 모으는 것보다 책으로 좁은 방을 가득 채우는 게 더 행복했다.


단점이라면 책을 사두고는 며칠이 지나도 읽지 않는다. 서점에 들어가면 신상 가방을 고르듯 이 책, 저 책 가득 담아 집으로 돌아온다. 내 생에 충동구매는 책 구입으로 끝나서 다행이다. 아니, 그대로 끝나서 문제다.


책만 보면 우울했던 기분도 좋아지고, 스트레스도 풀리지만 왜 책을 읽지 않는 것일까? 그런 내게 친구가 필사를 추천했다. 친구는 에세이 책을 읽고 필사를 하면 명상을 하듯 마음이 편해진다고 했다.


'책도 안 보는데 필사까지?'라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아, 귀찮은 일이야 '라고 마음속으로 담아두고 조언해준 친구에게 감사 인사를 보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혹시 필사해봤어?'
'아, 진심이었구나.'


그런 연유로 노트를 구입하게 된 것이다.

바로 답장 안 하기로 유명해서 책 하나 골라 부리나케 적고 보여줄 심산이었다.


그런데 쉽게 책을 선택할 수가 없었다. 종류가 많은 음식 메뉴를 보고 고르지 못하는 선택 장애가 책에도 해당될 줄은 몰랐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 멈추면 안 된다는 압박감마저 느껴졌다. '계획을 세우지 않아서 않아서 마음의 준비가 안된 걸까?' 아니면 '노트에 적을 적당한 책이 없어서일까?' 고민을 하다 결국 친구에게 사실대로 고백했다.


친구는 오히려 미안해하며 다그칠 생각은 없었다고 했다. 다만 책을 좋아하는데 왜 읽지 않는지 이유는 모른다고 했다. '시작이 어려워'라고 말했더니, 친구가 대답했다.


'넌 학생 때도 그랬어.'


친구 생일 선물을 매번 고민하다가 결국은 엉뚱한 걸 줄 때도 있었고 문제집을 살 때 완벽한 문제집을 찾는 사람처럼 보인다고 했다.


'그때는 신중하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 눈치 안 봐도 돼. 네가 책 읽는다고 해서 무슨 내용인지 안 물어봐, 걱정하지 마. 생각보다 사람들 자기 이외에는 관심 없어.'


고집이 고집을 부렸다고 생각했다. 공부든 취미든 시작이 어려웠다. 열심히 알아보고 계획을 세워도 막상 시작하려고 하면 거부감이 들었다. 내가 완벽주의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실패자로 보이기 싫었다. 누군가 질문을 했을 때 대답을 못하면 숨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다.


그런 나를 받아준 게 바로 책이었다. 부모님은 밤늦게 친구와 노는 건 허락하지 않으셨다. 대신 어떤 책이든 밤늦게까지 읽어도 제지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작가의 생각과 문장이 의미하는 뜻을 잘 찾지 못한 나는 그런 과정이 힘겨웠고 독서가 시험이 되는 순간,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다.

학창 시절 즐거웠던 '독서'와 '수험기간의 언어영역 문제'가 내 안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친구는 '표지 이쁜 거 골라봐, 네 악필 보고 뭐라 할 사람 없어.' 라며 전화를 끊었다. 여태 이런 친구를 옆에 두고도 몰라봤다니, 괜히 눈물이 났다. 장문의 감사 메시지를 보내고 다시 서재 앞에 섰다.


책장에 꽂힌 책 보다 쌓인 책이 더 많았지만, 종류별로 정리를 한 덕분에 구분은 쉽게 할 수 있었다. 위에서 두 칸, 여덟 번째 책 한 권을 슬쩍 꺼내보았다. 책들이 한쪽으로 쏠렸다. 작은 틈이 생겼다.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책갈피가 꽂혀있다. 읽다 만 책이었다. 

이제 공책과 연필만 닿으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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