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돌아오면 무거운 짐을 수시로 들고 나르는 일 때문에 손가락과 발가락은 퉁퉁 부어있다. 점점 두께가 두꺼워진다. 아무리 마사지를 하고 따뜻한 물에 담가도 관절 속까지 미치지 않는다.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부기가 빠지길 기다린다. 손과 발을 움직이지 않고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두 달을 그냥 보냈던 시간이 떠올랐다. 하루 종일 다른 사람들이 남긴 작품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나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이곳저곳을 도망치는 겁쟁이만 남아 있었다.
처음 5일 연속 근무를 하게 되었다. 이 삼일에 한 번은 쉬었는데 연속 5일은 처음이었다. 아침 일찍 출근하지만 그래도 오후에 끝나기 때문에 남은 시간에 할 일을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알면서도 매번 당한다. 인간은 후회하고 깨닫고 성장하는게 모토라지만, 계속 반복되면 혹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매번 당하고 혹독하게 대가를 치른다.
5일 알바 후 잠시 눕는다는 것이 하루를 넘겼다. 눈 깜짝할 새도 아니고, 눈을 감았을 뿐인데 다른 날이란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잠들어 크리스마스 다음날에 깬 기분이 이런 것일까? 그동안 쌓인 피로를 풀었지만 황금 같은 12시간이 증발했다. 형체도 수증기도 없다. 아직 잠에 취해 또 도망칠 궁리만 하는 겁쟁이 한 사람만 있었다.
구겨진 월급명세서를 다시 벽에 붙여 놓았다. 나에게 가장 필요한 건 돈이지만, 몸으로만 돈을 벌고 싶지 않았다. 한쪽에 처박힌 책들이 눈에 띄었다. 개정 전 토익 문제집들, 기초 일본어, 영어문법책, 그리고 포장지도 뜯기지 않은 서적들. 먼지 쌓인 그들의 모습을 보니 내 신세보다 더 처량해보인다. 한 때는 학구열을 불태우며 배움을 즐기던 때도 있었다. 돈에 눈이 멀어 잊고 지냈다. 아니 모른척하고 살았다.
나이도 적지 않고, 내가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기에는 아주 늦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궁금한 점이 있거나 의문점이 풀리지 않으면 해결할 수 있을 때까지 검색하고 책을 뒤져보고는 했었다. 인터넷 검색에 익숙해진 뒤로 실물을 직접 찾아보는 일은 조금씩 줄어들었다. 지적 욕구를 인터넷 기사로 잠시 잠재울 뿐, 항상 가수면 상태로 내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해결되지 않은 물음은 끊임없이 생겨났고,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부피는 커져만 갔다.
항상 머리가 무겁다고 느꼈던 이유는 이 때문이었을까? 그럼 어디서부터 풀어나가면 될까? 답이 떠오르지 않을 땐 일기장이나 기록들을 꺼내보면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예전에 썼던 다이어리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맨 뒷 페이지에 나의 목표가 적혀 있었다. 호기롭게 영어와 일어, 중국어 3개 국어 마스터, 그리고 한자 외워서 한문과 한시 읽기, 중고등학교 수학, 사회, 과학 다시 배우기, 한국사 자격증 취득 마지막으로 독서와 글쓰기가 있었다. '욕심 많고 의욕적인 사람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걸 한꺼번에 하려고 했으니, 게다가 세세한 계획표는 보이지도 않았다.
'중고등학교 사회, 과학 다시 배우기'에 시선이 머무른다. 아마 배움의 처음이라고 정했을 것이다. 생각보다 사회와 과학, 그리고 수학이 일상생활에서 많이 쓰인다는 걸 성인이 돼서야 깨닫고 나서 적은 계획이었다. 기록들을 보니 그때의 다짐이 떠올랐다. "내가 몰랐던 걸 알아가며 배운 걸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알려주자." 잠들어 있던 퀘스트 하나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한 궁금증 하나가 풀린 모양이다.
항상 목표로 한 시점은 적지 않으면 처음과 끝을 알기 어렵다. 다만 그만두지 않았다면 알 수 있다. 시작은 실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든 때, 바로 지금이다. 그동안 발길을 끊었던 서점으로 무작정 발걸음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