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아무것도 안 하는 날

by 녹차파우더

하루에 하나라도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잠에 못 드는, 버릇이 있다. 좋은 건 아니라서 습관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일을 하며 남는 시간에 배우는 걸 좋아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실력이 좋아지든 아니든, 관심 있거나 한번쯤 해보고 싶었던 취미를 시간 때우기용으로 생각한다. 인스타 피드 훑어보듯, 하루에 한 번 접속하는 모바일 게임처럼, 그냥 무심하게 재미있으니까, 시험을 보는 것도 아니고, 내가 원하는 대로 원하는 만큼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행위 자체를 좋아한다고 보면 된다.


어느 정도 호기심과 기대감이 max를 찍은 상태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두 달은 즐겁게 배운다. 캘리그래피를 배우면 '인스타에 감성적이고 멋들어진 문장을 글로 써서 좋아요나 받아볼까?'라든지, 심자의 운으로 조금이라도 칭찬을 받으면 원래 재능이 있었던 것처럼 김칫국 사발을 들이키며 전문가로 활동하는 자신을 상상한다.


조금씩 배우는 횟수가 늘기 시작하면 막히는 구간을 만나기 마련이다. 스스로 뛰어넘어야 하는 허들 혹은 평지보다 높은, 꼭대기로 향하는 언덕길을 만나게 된다. 넘기만 하면 보지 못했던 다른 물론 변수도 조건도 따져봐야 할 것들도 많지만 처음 맞이하는 시련을 견디는 일은 목이 말라 침대 옆 서랍 위 컵도 가지러 가기 싫은 것처럼 매우 귀찮게 느껴진다.



그렇게 해서 중단한 취미가 꽤 된다. 시간과 돈은 들였는데 남는 결과물이 없으니 누군가에게 이러한 취미를 하고 있는 중이다라고 말하기는 좀 부끄럽다. 알면서도 그만두지 못하는 건 일상의 지겨움 때문이다. 매일 일어나서 씻고 항상 아슬아슬하게 출근 세이브하고 퇴근은 칼 같이 맞춰 집에 와서 빈둥빈둥한다. 다른 거라곤 식사 메뉴뿐이다. 이러한 일상이 계속되자 돈을 벌어도 뭘 해도 즐겁지 않았다.



드라마를 봐도 영화를 봐도 그때뿐이고, 기억에 남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그 시간만 채우면 된다는 기분풀이에 익숙해져 버린 삶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더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일탈하고자 시작한 일이 취미뿐인 배움이었다. 근데 오늘은 그마저도 하고 싶지 않았다. 왜 해야 하는지 목표가 없으니까. 책상에 앉아 내일까지 끝내야 하는 아니 퇴근 전 상사가 준 일거리를 받아 밤을 새워서라도 끝내야 하는 일처럼 느껴졌다.


성취감이 느껴지지 않은 시간 때우기는 나를 더 텅 비게 만들었다. 그래서 정했다.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밀린 과제도, 늦은 진도 따라가기 바쁜 영어도, 궁금해서 산 책도, 무언가로 가득 채우려는 사심도 버렸다. 흘러가는 대로 걷고, 매번 걷던 길이 아닌 골목길도 둘러보고 여긴 누가 사는지, 이 골목에도 마음을 숨기고 애틋한 썸을 타는 연인들이 지나가는지, 오늘 가로등 불과 CCTV는 제 할 일을 다 했는지 궁금했다.


본 적 없는 음식점을 지나가며 나중에 여기 와봐야지 체크하고 교복 입은 학생들이 대화하며 지나가는 모습을 보며 교복은 이제 팔도 들어가지 않겠지라며 불룩 나온 배 한번 쳐다봤다가 아, 내일은 운동도 계획에 넣어야지 또 욕심부렸다가 아차, 고개 돌리며 다시 머리를 비운다.


사람들과 잠시 거리를 두었을 때, 집에만 있기 너무 지루해서 하루 종일 커피 한 잔으로 사람을 구경한 적이 있다. 카페에 찾아오는 사람을 그저 바라보는 일이었다면 지금은 직접 발품을 팔아 사람들이 적당히 있을 만한 곳을 찾아다닌다. 찬 바람이 '정신 차려' 라며 머리카락을 휙 건든다. 집에 돌아갈 거리를 생각 못했다. 불멍도 아닌 길멍에 이리 정신을 놓다니. 따릉이를 빌려 타 집에 돌아오니 긴 낮도 블라인드를 내린 지 오래였다.


아무것도 안 하려고 했는데, 결국 두 시간 정도를 걸어버렸다. 평소보다 오버페이스로. 숙제 안 한 벌을 걸음으로 대신 한 셈이다. 그래, 카페인 중독, 니코틴 중독 보다야 훨씬 깔끔하고 좋네. 사람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걸 다시 한번 느낀 하루였다. 결국 오늘도 잠을 설치긴 그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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