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선우 저<멋있으면 다 언니>(2021)
퇴근하고 아이를 어린이집에서 데리러 가기 전 잠깐 집에 들렀더니 책 한 권이 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얼마 전 주문한 책이었다. 단지 책 한 권을 시켰을 뿐인데 멋진 문구와 언니들의 사진이 들어가 있는 포토카드, 작가가 별도로 제작한 질문 노트가 들어있었다.
이 책을 구입한 독립서점 사장님이 손수 적어주신 편지까지 정성스럽게 포장된 기분 좋은 택배였다."북토크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던"이라는 문구에 사장님의 섬세함에 감동을 받았다. 그래도 감사함을 표하는 건 다시 서점에서 책을 주문하는 것이면 족하다는 생각에 분주히 새로 산 책을 들고 문 밖을 나선다.
워킹맘인 나에게 주로 독서시간은 아침저녁 출퇴근길 버스 안이나 이렇게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기다리는 시간이다. 이렇게 시간을 쪼개는 일은 처음엔 무척 서러운 일이었지만 요즘은 적응을 오래 한지라 아무렇지 않을 뿐 아니라 이 시간들이 나를 나로 서게 한다는 효험을 알게 되었다.
어린이집 문 밖을 나오자마자 아이는 크고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뜨며 내 팔을 잡아당긴다. 하원 하면서 아이스크림을 몇 번 사주었더니 이제는 하원 시간이 되면 침 흘리는 개 한 마리가 되어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 뛰어가는 것이다. 그럼 나는 "아빠한텐 비밀이야!"라고 말길도 못 알아듣는 세 살배기에게 단도리를 하고 아이스크림을 사 온다.
오늘은 장날이다. 동네에 선 장을 구경하다 자연스럽게 벤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뜯고 있는데 그 사이 두 명의 할머니가 양쪽에 앉았다. 처음엔 아이에 관심을 보이시다가 두 분이 자식이 몇 명인지, 자기가 여기 살기 전에 어디에 살았는지까지, 아주 잠깐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이에 두 분의 자서전을 써드릴 분량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오른쪽에 앉은 분은 나이가 여든, 슬하에 딸 둘 아들 둘이 있다고 했다. 왼쪽에 앉은 분은 여든여덟, 슬하에 딸 둘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아들이 최고라고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데 혼자 잘 커서 대기업 임원이 되었다고 한다. 두 분 다 남편분은 돌아가시고 혼자 살고 계셨다. 남자들은 왜 이리 일찍 죽는가에 대해서도 말씀을 나누셨는데, 이게 다 혼자 돈 벌다 일찍 죽는 것이라 하셨다. 두 분이 이야기하시다가 간간히 나에게 아이 동생은 안 만들 거냐 딸 혼자로는 외로울 거라 하시는데 내 한쪽 손은 오늘 도착한 책 <멋있으면 다 언니>를 엉덩이 밑에 더 깊이 넣어버리고 아이스크림을 먹는 아이의 입만 집중하고 입을 꾹 닫고 있었다.
난 어르신 나이가 되면 내 자식 이야기를 하기보다 내 자식이 우리 엄마 이런 사람이야 라고 말하게 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나는 그냥 내가 어떤 사람이다 떠들어대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아이 아이스크림을 먹이며 생각했다. 엄마가 읽은 책 한 권에도 짐 정리를 하다 발견한 편지 한 장에도 나다움이 묻어있는 그런 사람이 계속되어야겠다 생각했다.
모르는 사람에게 툭툭 말을 걸고 친구가 되는 어르신들의 살가움은 배우고 싶으면서도, 오늘 듣지 못 한 딸들의 이야기가 꼭 쓰지 못하고 말하지 못한 내 이야기고 내 삶인 것 같아 이상하게 마음속에 오기가 발동했다. 오기라기보다는 욱신거리고 움찔거리는 힘이라고 해야 하나. 이 글을 쓰면서도 가슴 한 구석이 욱신거린다.
<멋있으면 다 언니>는 오늘 할머니들에게 듣지 못 한 딸들의 이야기를 엮은 책 같다. 할머니들 때문인지, 아니면 언니들의 삶 때문인지 이 책을 읽으면서 불온서적을 읽는 것처럼 가슴이 떨렸다.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데 잘 되어 우리 집 최고라는 아들 이야기 말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온전히 자신만의 힘으로 자신을 일군 자랑스러운 딸들의 이야기 말이다. 이 책은 여자들의 불온서적이라 말할 수 있겠다. 읽고 나면 나도 멋있어지고 싶으니까. 두근거리는 심장을 멈출 방도가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