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서영 Apr 11. 2022

산후조리 일기, 따뜻한 인간

워킹맘 다이어리

출산한 지 일주일이 지났고 지금은 산후조리원에 있다. 코로나 여파로 산후조리원은 약간 수용소의 느낌을 하고 있다. 각자의 방에 밥과 간식을 넣어주고, 심지어 수유도 수유실이 아닌 각자의 방에 신생아를 데려다준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조리원 동기라는 것도 유명무실해졌다. 같이 밥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번호도 교환하고 채팅방도 만들던 때는 이제 없다.


산후조리원에서의 대부분의 일과는 뜨끈한 방에서 누워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모유수유를 안 하기로 한 나는 몸 컨디션도 좋지 않아 일체의 수유 콜도 받지 않고 있어 정말 하루 종일 누워있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럼 정말 잘 쉬다 오겠다고 생각하겠지만, 문제가 있다. 산부인과에서도 그렇고 산후조리원에서도 그렇고 너무 덥다. 가만히 숨만 쉬어도 인중과 뒷덜미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수면양말이나 내의를 벗으려고 하면 큰일이 난 것처럼 산모는 몸이 따뜻해야 한다는 말을 여러 번 듣는다.


시원한 탄산 한 잔 들이켜고 싶다. 얼음 동동 띄워서. 하지만 온돌침대에서 온도를 40도로 맞춰놓고 이북을 읽는다. <따뜻한 인간의 탄생>이라는 책이다. 이 책에서 인류는 체온조절을 위한 기나긴 여정이라 했다. 책에는 출산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지만 읽다 보면 왜 산후에 체온을 잘 조절해야 되는지도 짐작이 간다. 신생아는 온도와 습도에 아주 취약하다. 당장 조리원에서도 우리 아기는 온도 습도 조절이 잘 되어있는 신생아실에 있다가 내 방에 들어오면 재채기나 딸꾹질을 한다. 털, 옷, 집. 모두 인간의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지고 진화된 것이다.


오늘은 산후마사지를 받으러 갔다. 관리사는 내 맥을 짚더니 요 며칠 힘들어했던 것들을 점쟁이처럼 모조리 맞추었다. 밤에 잠을 설치고 조금만 온도가 올라가도 덥다고 느끼고 몸의 어디 부위가 아프고. 그게 다 심장에 열이 쏠려서라고 했다. 하체는 따뜻해야 하고 위로 올라갈수록 차가운 것이 좋다고 하는데 지금 내 몸은 거꾸로 되어있어서 조금만 온도가 올라가도 못 견딜 거라고. 관리사의 말로는 일명 화병이라고. 번아웃이라고 했다.


화병이라는 말을 들으니 딱 10년 전 이맘때가 떠올랐다. 애를 낳은 것도 아닌데 병원에서 내가 화병에 걸렸다는 것이다. 맥이 불규칙하고 불면증도 심해지고 작은 일에도 깜짝 놀라는 일이 빈번하며 대인기피증까지 생겼었던 때였는데, 젊은 20대 여자가 결혼도 남자 친구도 없는데 화병에 걸릴 일이 뭐가 있을까. 내게 화병은 지병 같은 것이다. 관리사는 내 혈액형과 형제 유무를 물었다. 딱 보아하니 잘 참는 스타일이라고 내 성격을 짐작하셨는데, 나는 오히려 질르면 질렀지 참는 스타일이 아니라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마사지 관리사는 조리원에서 아무것도 하지 말고 시체처럼 누워있으라고 했다. 그냥 누워있는 게 아니라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무념무상의 상태로 누워만 있으라고 했다. "제가 그게 안 돼요. 가만히 있지를 못 해요." 그러니까 화병에 걸린 거라고 관리사는 말했다.


관리사의 말을 저버리고 또 누워서 이렇게 일기를 쓰고 있다. 지인지꼰. 지 인생은 지가 꼰다고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이 딱 그것이다. 그러게. 나는 왜 화병에 걸렸을까. 내 안에 화는 왜 이렇게 많을까.


조리원 방에 들어와서 거울 앞에서 빨갛게 달아오른  혀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체온은 생존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했다.  체력이 약해지면 아이에게도 못난 말이 나가기도 한다. 어른들  틀린 말이 하나 없다. 따뜻하게 산후조리 잘해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둘째 출산! 쿨병에 걸려버린 엄마의 후기 없는 후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