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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영 Jun 09. 2022

나의 돌봄일지

워킹맘 다이어리

출산휴가 중 강원도에 있는 본가에서 3주 동안 지내게 되었다. 네 살 딸, 2개월 된 신생아, 동생네 3살 딸까지 돌봐야 하는 아이 세 명에, 90이 넘은 할머니까지 우리 집에는 돌봐야 하는 사람 투성이다.


할머니는 보조기구가 있으면 걷는 것이 가능하시고, 치매가 있으셔서 물어본걸 또 물어보신다. 화장실을 혼자 가실 수 있는데 화장실에 가실 때마다 소변이 묻어 팬티와 바지를 갈아입으셔야 한다. 하루에도 열 개가 넘는 팬티를 갈아입으신다. 속초에 와있는 동안 비가 오고 날이 흐려서 본가 세탁기와 건조기는 하루 종일 돌아간다. 치우면 아이들이 어지럽히고 치우면 아이들이 어지럽혀서 치우는 게 의미가 없지만 하루 종일 치운다. 침대에 누워있던 할머니가 아이들 뛰노는 소리에 거실로 나온다. 하루 종일 넌 누구냐, 누가 낳은 아이냐 물어보신다. 목이 쉬도록 대답을 한다. 자고 있는 갓난쟁이 발을 조물딱 만지신다.


돌봐야 되는 사람 중에 하나라서 고되기는 하지만 함께 돌아가며 돌보기 때문에 할 만하다. 맨날 똑같은 레퍼토리로 지루했던 첫째가 덕분에 제일 신났다. 네 살이라 말을 제법 잘하는 편이지만 내려와 있는 동안 더 말이 늘었다. 안 하던 애기 짓과 고집이 늘었고 가뜩이나 편식이 심한데 더 심해졌다. 밤에는 잠 안 자고 더 놀고 싶다고 매일 보채다 자정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든다. 안 하던 배변 실수를 하기도 한다. 재밌는 게 워낙 많아서인지 소변을 참다가 바지에 실수를 한다.


내려와 있는 동안 아기띠를 하고 산책을 하고 아이 셋 목욕을 시키느라 손목이 아프지만 그냥 이렇게 다 같이 있는 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풍요롭다. 풍족하다. 풍요로움이란 금전적 풍요도 있지만 정신적 풍요가 정말 존재하는구나를 느낀다. 아이가 신경질적으로 울면 짜증이 날 법도 한데 짜증이 나지 않는다.


첫째와 둘째가 입을 커플 원피스를 샀다. 다림질한 원피스를 입고 놀이터로 나간다. 비가 내렸던 탓에 물기 머금은 놀이터에서 흙을 만지고 논다. 자갈돌을 손에 쥐고 엄마 이거 봐 엄마 이거 봐한다. 개미집을 구경한다. 평상시에는 이틀에 한번 꼴로 목욕을 시켰는데 종일 노느라 땀이 나고 흙만진 손에 목욕을 거를 수가 없다.


내려와 있는 동안 갑자기 할머니가 오른쪽 눈을 못 뜨셔서 오늘 안과에 다녀오셨다. 매일 안약을 넣어드려야 한다고 한다. 첫째 아이는 할머니 얼굴이 신기한지 빤히 바라보다가 할머니가 자꾸 윙크를 한다고 한다.


하루 종일 아이 빨래, 할머니 빨래가 돌아간다. 나도 세탁기처럼 돌봄을 쉬지 않는다. 와있는 동안 돌봄 만렙이 되어 돌아갈 것 같다. 출산휴가 중 가장 잘한 게 본가에 내려온 일인 것 같다. 정말 잘 왔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잘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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