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맘 다이어리
둘째 출산휴가로 속초인 본가에 내려와 있다. 육아휴직 중인 동생이 내가 속초 한 달 살기로 본가에 내려간다고 하니 덩달아 내려왔다. 덕분에 본가는 아이들 울음소리, 웃음소리, 옹알이 소리로 가득하다.
그런데 웬걸.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딱 위층에 새로 이사 온 사람이 한 달 동안 리모델링 공사를 한다고 한다. 온종일 드릴 소리로 아이들이 낮잠도 못 자고 울어댄다. 그 드릴 소리가 꼭 내 앞에서 들리는 것 같다. 상대적으로 공사 소리가 적은 방을 돌아다니다 보니 아빠 서재방에 온 가족이 피신해있었다.
그 와중에 아빠는 컴퓨터를 하고 있었는데 무슨 땅 같은 걸 보는 거 같았다. 대충 엄마와 대화 나누는 걸 들으니 500평 되는 땅을 살까 고민 중이라고 한다. 저번에도 친한 지인과 땅을 나눠 살까 고민하더니 이번엔 정말 진심인지 gps를 켜고 그 땅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그 뒤통수를 보고 있자니 꼭 청약 당첨되려고 여기저기 청약정보를 뒤지고 새벽까지 밤을 꼴딱 새우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오늘은 아빠가 고민하고 있는 그 땅을 보러 갔다. 차 안에서 아빠한테 그 땅을 왜 사려는지 물었다. 농사를 짓고 싶다고 했다. "농사? 아빠가 무슨 농사." 농사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진심이 말로 튀어나왔다. 여태껏 글만 쓰던 전업작가가 무슨 농사. 전구도 하나 못 가는 사람이 무슨 농사. 아빠는 밭농사 말고 그냥 나무 심고 열매 따러 오고 싶다고 했다. 목이 좋으면 농사짓다가 전원주택을 지어 살 수도 있다고. 그렇게 우리는 아이 셋을 데리고 구불구불 산속으로 차를 끌고 갔다. 우리는 어느 소 농장 앞에 차를 세웠다.
여기서부터는 도로가 포장이 안 돼서 걸어가야 돼. 아빠가 말했다. 아이들 데리고 차에서 내렸다. 산비둘기 소리, 뻐꾸기 소리, 맹꽁이 소리, 소울음소리. 영락없는 시골 동네였다. 나는 생후 2개월 된 아기를 아기띠에 매고, 동생 내외는 두 돌 된 아이 손을 잡고, 나머지 내 세돌 된 첫째 딸은 우리 엄마 손을 잡고 구비구비 아빠가 찜한 땅을 보러 갔다.
네비대로 한참을 들어갔는데도 결국 네비도 잘 안 잡히고 그 땅이 어디 있는지 못 찾겠어서 아빠에게 그 땅 보는 거 포기하자고 말했지만 아빠는 마치 여기 와본 사람처럼 네비도 안 잡히는 그 땅을 보러 앞서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아빠는 운전도 못 하는 사람인데. 과수농장 하려면 부지런히 보러 와야 할 텐데. 내가 살 것도 아닌데 마음속엔 포기가 들어서 있었다. 아빠 돈은 엄마 돈이기도 한데, 정작 엄마는 땅엔 관심도 없고 길가에 난 꽃이며 풀이며 온통 관심이 땅이 아니라 땅바닥에 가 있었다. 그사이 엄마는 네 잎 클로버를 두 개나 찾았고, 내 딸 손톱에 애기똥풀로 매니큐어를 칠해놓고 있었다.
돌아가는 길목에서 우리는 아빠 빼고 사진을 찍었다. 그냥 우린 오늘 사진 찍으러 온 건가. 자연놀이를 하러 온건가. 우리 차가 주차되어있는 소 농장 앞에서 아이들과 소구경을 하는데 엄마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농장 있는 이쯤만 돼도 살 텐데."
아빠가 돌아왔다. "땅 봤어?" "응, 봤어."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아빠에게 살 거냐 말 거냐 딱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새로 생긴 공원인데 아이들이 뛰어놀기 좋은 자연놀이터가 조성된 곳에 우리 차가 멈췄다. 한동안 비가 오던 속초였는데, 어제까지만 해도 비가 왔었는데 비가 갠 지 얼마 안 돼서였는지 하늘에는 청량한 구름이 떠 있었다.
구름이며 나무며 뛰어노는 아이들이며 너무 아름다웠다. 아이들 사진을 찍었다. 카메라 셔터를 무진장 눌러대는데도 한 명이 예쁜 표정을 지으면 한 명이 얼굴을 안 보여준다던가, 둘 다 웃는 표정을 찍기 너무 어려웠다.
우리는 공원 산책 후 저녁을 먹으러 식당에 들렀다. 돌아가는 길에 바닷가에 들러 발목까지 바닷물을 담그다 집에 돌아왔다. 좋은 소고기에 좋은 와인.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먹고 마시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업되어 평소에 안 하던 말들을 서로 술술 이야기한다.
동생이 아까 공원에서 아빠한테 "땅 사고 집 짓는 게 행복이 아니라 이런 게 행복이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빠는 그 말에 감명을 받았는지, 술에 취해버린 건지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했다.
동생이 또 말 한마디를 거든다.
"아빠, 난 내 인생에서 오늘이 가장 행복했어."
행복. 행복이란 뭘까. 간단하고 쉽게 채워지는데 그게 참 공기 같아서 채워져있음을 쉽게 잘 포착하기 어려운 것 같다. 마치 내 휴대폰 사진 폴더에 오늘 찍은 사진들처럼 찰나에 포착되는 한 장을 위해서 수백 장 수천 장을 찍어대는데 한 장에 행복을 전부 담기는 어려운 것. 그라고 어느 한 장도 버릴 수가 없는 것. 행복이 뭐 별거냐고 백날 말하지만 진짜로 별게 아니다. 그냥 우리가 이렇게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수도 없이 모래를 매만지는 파도처럼 그렇게 행복은 오고 가는 파도를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