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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영 Aug 29. 2022

할머니가 요양원에 들어갔다

워킹맘 다이어리

월요일 출근하는 아침, 대문을 여니 성큼 가을이 온 것을 체감한다. 비도 조금씩 내리고 있어서 뒤늦게 아이 옷을 더 껴입으라고 남편에게 문자도 남겨놓는다.


"할머니 오늘 요양원에 들어가게 되었어."


엄마에게 카톡이 왔다. 어린이집처럼 요양원도 대기를 걸어놔야 하고 언제 들어가게 될지 순번을 기다려야 된다고 들었던  같은데 생각보다 요양원에 일찍 들어간 것이다. 손녀인 나도 이렇게나 마음이  좋은데 할머니를 보내야 하는 아빠와 엄마 마음은 오죽할까 가늠도  된다.


수년 전에 읽은 <삶의 격>이라는 책을 다시 꺼내 들었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책이고, 이 책을 읽게 되었던 시점이 할머니가 아프기 시작한 때이다. 5년 전에 요강을 밟고 쓰러지셨는데 넘어지면서 뼈가 부러진 것이다. 노인은 젊은 성인이랑은 달라서 호전되기 쉽지 않고 병원에 오래 있던 탓에 섬망 증상도 생겨 병실에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있는 병원에서 다른 병원으로, 다른 병원에서 다시 원래 있던 병원으로, 유령처럼 병원을 떠도는 것에 반복이었다. 병원에 입원해있는 노인들의 대부분이 이런 식으로 옮겨 다닌다는 것도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하게 되면서 알게 되었다. 할머니의 존엄성이 점점 소멸되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주변 사람들에게도 어려운 일이지만, 할머니의 존엄성을 최대한 지켜드리려는 노력도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새벽에 할머니가 난동을 피운다며 손발을 묶어도 되냐고 묻는 병원도 있었다. 갑자기 도망가려는 할머니를 어찌할 수 없었다고 하는데 어느 누구라도 새벽에 그런 전화를 받았을 때 묶지 말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모두 지켜볼 수밖에 없지만 할머니를 대신해 이 모든 문제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대행이 바로 아빠였다.


할머니의 몸이 더 악화된다고 해도 할머니를 더는 이런 식으로 케어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 아빠는 할머니를 결국 집으로 모셔왔다. 할머니를 결국 집으로 모셔오기로 했을 때는 아빠도 단단한 결심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보통 '퇴원'의 개념은 몸이 호전되어 일상생활이 가능하게 되어 하게되는데, 그때 당시 할머니의 몸상태는 '호전'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할머니의 상태가 결코 나아지지 않았음에도 선택한 퇴원으로 인해 아이러니하게도 할머니의 몸상태는 점차 호전됐다. 물론 그 과정에서 몇 번의 소동이 있었긴 하지만 걷지 못하던 할머니가 보조기구를 이용해 점차 걷기 시작했고, 섬망 증상도 호전되어 할머니가 가족들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할머니의 몸이 조금씩 호전될 즈음 나는 결혼을 하고 아이도 두 명이나 낳았다. 할머니에게 두 아이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할머니가 내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할머니의 몸상태가 호전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음으로 할머니와의 이별을 준비했다. 그 후로 벌써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할머니의 몸이 호전되었다고 해서 할머니와 영원히 함께 할 것이라고 여긴 것은 아니었다. 병원에 있을 때보다 괜찮았을 뿐이지 할머니의 몸은 호전된다기보다 죽음으로 점점 다가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 년도 늙어봐! 나처럼 되어보면 알지!" 할머니는 어릴 적 나를 키우실 때도 나에게 똑같은 이야기를 했었다. "너도 너 같은 딸 낳아라!" 어린 나이임에도 그 말이 너무 무서워서 이불속에서 엉엉 울었던 기억이 있다. 문지방 너머로 할머니의 팬티를 들고 실랑이를 하던 때 할머니의 저주 같은 말들을 다 받아주고 할머니의 똥이불을 빨고 이 모든 과정이 할머니의 삶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이 유한함을 받아들이는 과정이었다.


할머니의 병세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할머니와 집에서 함께 보내는 마지막 시간이 둘째를 낳고 백일이 안 되었을 때였다. 새벽에 옹알이를 하는 둘째를 안고 할머니 방 침대에 누워 아이는 옹알이를, 할머니는 아기의 발을 조물 거리며 만지고, 나는 둘째가 얼마나 총명한지 할머니에게 자랑을 했다.


그 순간만큼은 할머니의 존엄이 여전히 살아있다고 느끼고, 쉬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고 느꼈다. 사람들이 세상에 살아있는 한, 우리가 우리로서 끊임없이 이어지며 존재하는 한, 존엄을 위협하는 무언가가 있을지라도 생명이 소멸하는 순간까지도 우리는 존엄을 체험하는 한 가운데 그 중심에 있다고.


"존엄은 개인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 그 이상의 무엇이다. 존엄은 개개인에 관한 문제에 그치지 않고 그보다 한층 더 광대하고 객관적인 것으로서,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선다. 즉, 삶의 전반적인 형태라는 특성을 띤다. 인간은 물질화·수단화되면서 굴욕을 당한다. 그래서 존엄성은 법적 장치를 통해 보호된다. 이는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 결정권보다 상위에 있는 가치다. 그러므로 누구든 자신의 존엄을 마음대로 내던져서는 안 된다." 페터 비에리, 《삶의 격》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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