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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영 Oct 06. 2022

산후우울증 일기(2) 문장 완성검사

워킹맘 다이어리

그만 울고 싶은데 또 운다. 울면 엄마도 깨고 애도 깨니까 조용히 운다. 내가 자랑스러운 건 남몰래 운다는 것. 안고 있는 아이의 몸에 눈물이 떨어지면 아이가 깨니까 물 마시는 닭처럼 고개 들고 운다. 내가 우는 건 슬퍼서가 아니라 내가 나를 잃지 않기 위해 지금 할 수 있는 방법이 우는 것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늘은 지방에 사는 엄마가 서울 병원에 검진하러 왔다가 원래는 동생집에서 자고 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동생이 코로나에 걸려 우리 집에 오게 되었다. 엄마는 내 옆에서 코를 골고 자고 있고 둘째 아기는 내 옆에서 자고 있는데 안 그러던 애가 중간중간 깨서 빽빽 우는 통에 잠이 오지 않던 중에 내 잠이 더 달아나버렸다. 

병원에서 받은 문장 완성검사라는 숙제를 하고 있다. 깊게 생각하지 않고 적기 시작하는데 첫 문장부터 놀랐다. 첫 문장 완성은 "어렸을 때 우리 가족은" 뒤에 문장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뒤를 가난했다고 완성했다. 사실 우리 집은 가난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름 28평 자가 아파트에 살았다고 한다. 문장 완성검사는 팩트와는 별개다. 어릴 적 내면 아이에 기반한 것 같다. 무의식이 무섭다고 느꼈다. 


학창 시절에 대한 문장에는 '따돌림'이라고 썼다. 문장을 완성하고 또 한 번 놀랐다. 난 사실 가까운 친구들이나, 가족 그 어떤 사람에게도 학창 시절에 겪었던 따돌림에 대해서 말한 적이  없다. 엄청나게 대단한 아픔도 아니고 말하면 그 시절이 떠오를 수 있으니까. 내 머릿속에서 조차 사라진 기억이라고 여겼던 것 같은데, 이렇게 불쑥 나를 찾아왔다. 


검사를 통해 나오게 되는 것이 무척 신기했다. "사람들은 나에 대해" 뒤에는 "잘 모른다"고도 썼는데 이글로 예상이 되겠지만 난 내 치부를 잘 드러내는 편이다. 그런데 그 문장을 통해 떠오르는 건 치부 속에 치부, 내 진짜 속마음, 내 진짜라는 것들이었다. 이상형에 대해서 쓸 때도 놀랐다. 예전이라면 자상한 남자 같이 많은 대화를 하는 남자 이런 걸 썼을 텐데, 말을 안 하는 사람이라고 적었다. 나 조차도 놀랐다. 싫어하는 사람에 말이 많은 사람이라고 적었다. 나 그만 듣고 싶구나 말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라는 생각이다. 엄마에 대한 문장은 바쁜 사람이라고 적었는데 엄마와 나는 비슷하다고 적은 것을 보면 엄마에 대해 투사를 하고 있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써놓은 50개 문장들을 읽고 또 읽었다. 읽을수록 실마리가 잡히는 듯했다. 그러나 이건 어찌 됐건 뇌피셜이다. 정확한 건 전문의에게. 대부분 부정적인 문장들이 많지만 내가 써놓은 문장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문장은 “내 삶에서 사랑은 늘 도처에 있다”는 문장이었다. 그리고 가장 인상 깊었던 문장은 가족에 대한 문장이었는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이다 라는 문장 뒤로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가족이다라는 문장이었다. 

어제부터 점심 산책을 시작했다. 저녁 산책은 어둡고 아무래도 일 같고 좀처럼 웃음이 나지 않는다. 점심 산책이라고 다를 건 없지만 밤 산책에 비해 덥고 혼자다. 산책을 하다 보면 할머니들이 벤치에 앉아있다. 오늘은 구슬프게 노래 부르는 할머니가 있었는데 우리 할머니가 생각이 났다. 슬펐지만 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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