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서영 Oct 06. 2022

산후우울증 일기(3) 삶의 과업

워킹맘 다이어리


정신과에서 받은 일주일 치 약은 매일 아침에 한 알 먹는다. 아이들을 키우고 있기 때문에 졸음을 유발하는 약은 처방받지 않았지만 평소보다 졸리다. 이 약을 먹으면 처음에는 거부반응이 있을 수 있지만 꾸준히 먹을수록 점점 괜찮아질 것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약을 먹어도 거부반응이 지속된다면 다른 약으로 바꾸는 것이 나으니 일단 계속 복용해보라고 했다. 약을 먹는 일주일 동안 여전히 우울했다. 어떤 날은 비 오는 새벽에 나가 혼자 울고 들어온 날도 있고, 남편 없는 저녁 날은 아이들 방에 잠시 두고 베란다에서 속을 삭히기도 했다. 휴일이 하루 더 있었던 지난 주말은 가족들과 무얼 해야 하는 하루가 더 있어서 힘들었다. 약을 먹고 상담을 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던 한 주였다.


두 번째로 방문한 정신과에서는 지난번에 혈액 검사했던 결과가 나와서 설명을 들었다. 갑상선 수치가 평균 범주를 벗어나 아무래도 내과에 방문하라고 했다. 출산 후 6개월 이내에 산후 갑상선염이 생길 수 있고, 자연적으로 사라지는 경우가 있다길래 갑상선 질환인가 큰 병원을 찾았는데, 정신과에서 받은 진료의뢰서를 들고 내과로 가는 길에 "그래, 차라리 잘 됐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정신과 약은 혼자 쉽게 끊을 수 없고 최소 몇 달은 복용해야 하니까 정신문제가 아니라 신체적인 문제가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과를 방문하기 전에 들렀던 정신건강센터에서 전화가 왔다. 정신건강센터에서도 정신과보다는 신체검사를 먼저 하는 것을 추천했다. 출산 후에는 급격한 신체변화가 있는 기간이므로 정신문제뿐만 아니라 신체변화로 인한 질병들이 먼저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과에 가니 내가 정신과에서 복용하는 약 이름을 알아와야 한다고 했다. 정신과 약은 약국에서 받은 게 아니라 정신과에서 상담과 약 처방을 한 번에 받는다. 약봉투에는 약 이름이 쓰여있지 않았다. 정신과에 전화해서 이름을 알아냈는데 약 이름을 검색하니 엄청 많은 부작용들이 검색됐다. 약을 먹는 한 주 동안은 입맛이 더 사라지고 어지럽거나 헛구역질이 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약 이름으로 검색한 부작용란에 다 써져 있는 내용들이었다.


내과에서는 갑상선 수치가 평균 범주를 벗어난 것은 맞지만 피로감이나 중증 우울 에피소드를 가질 만큼 나쁜 수치는 아니라고 했다. 결국 별다른 약 처방 없이 한 달 후 다시 피검사를 해보자는 말만 듣고 병원을 나왔다.


나 정말 우울증이 맞구나 마음이 또 가라앉았다. 오후 반가를 내고 병원을 다녀왔던 터라 시간이 한 시간 정도 남았다. 베이비시터 선생님이 둘째 돌봐주시는 동안 낮잠을 자야겠다. 마침 둘째 아이 낮잠을 재우려던 참이었는지 집에 온통 불이 꺼져있고 암막커튼이 쳐져있었다. 베이비시터 선생님께는 우울증으로 약을 먹고 있는 것을 먼저 이야기한 터라 어머님 들어가 쉬시라고 배려해주셨다. 딱 30분 알람 켜놓고 잠을 잤는데 한 번도 안 깨고 꼴깍 잠들었다 일어났다. 첫째 어린이집 하원을 하고 집에 돌아왔다. 남편은 밀린 일이 많아 야근하고 온다고 한다. 하루 종일 김밥 한 줄 먹은 게 다 인데도 배가 고프지 않다. 역시 약 부작용인 것 같다.


지난주에는 책도 두 권 대출해 읽고, 미세먼지가 많은 날을 제외하고는 매일 점심 산책을 다녔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3주가 다 되어간다. 그 사이 할머니는 우리 엄마 꿈속에도 나오고 내 동생 꿈속에도 다녀가셨다고 한다. 내 꿈에는 언제 오시려나 자기 전에 할머니를 생각한다. 둘째 아이 잘 자라고 파도소리나 모닥불 소리를 틀어주는데 그때마다 할머니 생각이 절로 난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보고 싶어서 운 적은 있지만 할머니가 지금 내 우울감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다. 할머니가 살아온 지난날 중 우리가 함께 했던 날들을 곱씹어 보며 할머니가 내게 보여주셨던 자신의 삶에 대해 숙고하는 요즘이다. 오히려 할머니는 앞으로 내 남은 삶에 식솔들 챙기기라는 과업을 넘기고 가셨다. 건강하고 행복한 모습으로 인간으로서의 삶의 긍정을 잃지 말라는 그런 목소리처럼 존재 이유로 파도소리처럼 모닥불처럼 남아있다. 남은 가족들에게 내가 살아있는 모든 순간마다 존재의 이유를 알리다 가는 것. 할머니가 내게 유산처럼 물려준 자신의 과업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산후우울증 일기(2) 문장 완성검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