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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영 Oct 13. 2022

산후우울증 일기(4) 우울증이 있어도 웃는다

워킹맘 다이어리

이번 주는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주변에 공공연히 내 힘든 것을 말하는 것이 자기 무덤 파는 일인 것을 알지만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우울증에 걸린 것을 알렸다. 그래서 배려도 받고 위로도 받는 한 주였다.

 

하루 중 가장 힘든 시간은 아이 둘을 혼자 돌봐야 할 때다. 대략 두세 시간 정도인데 이 시간만큼은 정말 아무것도 하기가 싫고 일에 집중하기 힘들다. 그래도 꾸역꾸역 집안일을 하고 육아를 하다 보면 시간이 지난다. 남편이 퇴근하고 돌아오는 오후 7시 남짓한 시간이 되면 머릿속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베란다 같은데 잠깐 나가서 멍을 때리거나 아이들 돌보면서 멍 하게 앉아있다. 찾아보니 우울증 환자들 중 입맛이 없는 경우에 오후에 혈당이 떨어져 더 우울감이 생길 수 있다고 한다. 요즘 일부러 군것질을 안 하고 있었는데 오후에는 일부러 군것질을 해보려 한다.


우울증 약을 먹은 이후로 원래도 없었던 식욕이 정말 더 없어졌다. 하루 종일 먹지 않아도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입맛이 없다. 이번 주 평일은 특히 선물 받은 고구마로 끼니를 채웠다. 저녁시간이 되면 이런 식으로 입맛이 없으면 밥을 안 먹어도 되겠다 싶지만 아이 밥을 먹이면서 남은 음식을 억지로 먹는다. 사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폭식의 조짐이 있었는데 할머니를 보낸지 3주 정도 지나니 식욕이 다시 원래처럼 사라지고 폭식도 하지 않게 되었다. 언제 그랬냐는듯 다시 일상을 보내고 있다. 폭식했던 며칠 살이 쪘었는데 오늘 다시 아침에 몸무게를 보니 살이 빠졌다.


정신과 다음 진료는 일주일 후이다. 식욕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약을 바꿔서 처방받을 수 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식욕을 제외하면 약이 큰 이질감이 드는 편은 아니었고, 수면장애가 생긴다거나 일상에 방해하는 것들은 없었다.


요 며칠 아주 재밌는 일이 있다. 남편이 나 몰래 얼굴에 미용시술을 받고 온 것인데 남편 얼굴 양 볼에 커다란 멍자국이 생겨 온 것이다. 남편 얼굴에 생긴 멍은 족히 일주일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모양새다. 요 며칠 나는 남편 얼굴을 볼 때마다 웃는다. 얼굴에 꿀을 발라 놓은 것처럼 자꾸 남편 얼굴을 쳐다보고 웃는다.


우울증이 있다고 해서 웃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울증이 있는 사람도 웃긴 일이 있을 때는 웃는다. 웃는다고 해서 우울증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우울증은 우울증대로 있고, 웃는 것은 또 웃는 것대로 웃는다.


처음에 남편 얼굴에 든 멍을 보고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나는 배꼽을 잡고 거실을 구르며 웃었다. 남편은 얼굴이 만신창이가 된 것이 속상했는지 또 억울한 표정을 짓는데 나는 또 그 표정이 웃겨서 웃는다. 남편의 넘치는 식욕과 나의 전무한 식욕을 서로 물물교환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도 예전에는 속상한 일이 있으면 술을 마시고 싶었는데, 욕구가 사라진 요즘에는 술 마시고 싶은 욕구까지 싹 사라졌다. 이렇게 무언갈 하고 싶은 욕구가 전무한 상황을 지켜보던 남편은 정 안 되면 무리를 해서라도 이사를 간다던지, 여행을 간다던지 일상의 변화를 가져보는 것이 어떠냐고 한다. 남편의 말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기 전에 이사를 가는 상상하고 내가 좋아하는 일본 여행을 가는 상상을 했다. 여전히 무언갈 하고 싶은 욕구는 없지만 상상만으로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기도 하다. 다음 달에 동생과 아이들 없이 일본 여행을 가기로 했다. 갔다 오면 정말 내 우울증이 나아져있을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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