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새독서
어느 날 유튜브를 보다가 구의 증명이라는 제목의 영상을 틀게 됐다. 플레이리스트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nc8hi9WBNkA
구의 증명이라는 소설의 첫 만남은 바로 이 영상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소설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고요하면서도 로맨틱한 음악과는 다르게 구의 증명이라는 소설은 사람을 먹는 이야기다. 왜 너를 먹을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증명을 다룬다.
만약 네가 먼저 죽는다면 나는 너를 먹을 거야.
청설모가 되기 위해 들어온 이곳에서, 구가 말했다.
그래야 너 없이도 죽지 않고 살 수 있을 거야.
나를 먹을 거라는 그 말이 전혀 끔찍하게 들리지 않았다.
네가 나를 죽여주면 좋겠어. 병들어 죽거나 비명횡사하는 것보다는 네 손에 죽는 게 훨씬 좋을 거야.
우리는 서로를 바라본 채 모로 누워 팔과 다리와 가슴으로 상대를 옭매였다.
네가 죽으면 살 이유가 없다. 그래서 너를 먹으면 너 없이도 죽지 않고 살 수 있다. 책에서는 소니 빈 가족의 일화를 언급하는데 소니 빈은 자기 부인이랑 강도짓을 하며 살았다. 돈과 보석과 물건을 뺏으면 죽이고 남은 시체를 남기지 않기 위해 먹었다. 그러는 동안 열네 명의 자식이 태어났다. 열네 명의 아이들은 사람 고기를 먹으며 무럭무럭 자란다. 그 자식들이 스물두 명의 자식을 낳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소니 빈의 가족은 마흔여덞 명으로 늘어났다. 사람이 많아지자 작업은 점점 세련되고 전문화되었대. 분업이 시작된 거지. 누구는 강도, 누구는 살인. 누구는 고기 말리는 담당. 누구는 고기 절이는 담당. 누구는 보관 담당. 누구는 내장처리. 그렇게 작업속도가 빨라지니까 다 먹지 못하고 썩어서 버리는 사람 고기가 넘쳐났대. 소니 빈의 자식과 손주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사람 고기를 먹어서, 사람 먹는 걸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어. 우리가 일을 해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돼지고기를 사 먹는 것처럼.
사람이란 뭘까. 구를 먹으며 생각했다. 나는 흉악범인가. 나는 사이코인가. 나는 변태성욕자인가. 마귀인가. 야만인인가. 식인종인가. 그 어떤 범주에도 나를 완전히 집어넣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사람인가. 아이는 물건에도 인격을 부여하지만 어른은 인간도 물건 취급한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무럭무럭 자라면서 우리는 이 세계를 유지시키고 있다. 사람은 돈으로 사고팔 수 있다. 사람은 뭐든 죽일 수 있고 먹을 수 있다.
흉악범, 사이코, 변태성욕자, 마귀, 야만인, 식인종. 사람을 먹는 사람을 규정지을 수 있는 것들이지만, 그 어떤 범주에도 담이를 완전히 집어넣을 수 없었다. 다시 되묻는다. 그렇다면 나는 사람인가. 사람이란 뭘까. 담이는 구를 먹으며 생각한다. 아이는 물건에도 인격을 부여하지만 어른은 인간도 물건 취급하는 걸. 소니 빈 일가에서 태어난 아이들과 후손들은 그 어떤 죄책감과 죄의식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우리는 과연 그 어디쯤 어떤 범주 안에 있을까.
이 책 덕분에 좋은 음악을 알게 됐다.
https://www.youtube.com/watch?v=pfrOOKpiuhg
창세기 - 어떤 종말은 작가님이 한 시간 동안 한 노래만 들을 정도로 좋아했던 노래라고 작가의 말에서 소개한 노래다. 이 책은 먹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기보다 왜 먹을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책이다. 이 책은 확실히 몰입감이 좋은 소설이다. 짧게 짧게 나누어 짧은 산문집 구조로 소설이 구성되어 있어 집중력이 좋지 않은 어른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우울감이 깊은 사람에게 유해하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래서 더 공감이 가는 책이다. 공허함이 책의 전반에 깔려 있어서 오히려 우울증이 있는 사람에게도 술술 잘 읽히는 책이다.
책의 말미에서 작가의 말에 적힌 글을 읽다 보면 왜 이런 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 수 있다. 말캉한 애인의 살을 깨물며 먹는 시늉을 하던, 그 시절 연애를 떠올리다 보면 사랑을 하고 있으면서도 사랑을 하고 싶고, 글을 쓰고 있는데도 글을 쓰고 싶은 기분. 사랑하고 쓴다는 것을 내게 가장 좋은 것이며, 앞으로 더 좋은 것 따위 되도록 오랫동안 모른 채 하고 살고 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