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을 읽고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챗GPT에게 불교 관련 서적을 추천받으면서였다. 『월든』에 대한 정보 없이 읽기 시작했을 때는 다소 당황스러웠다. 호숫가에서의 생활을 이렇게나 길게 서술할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고, 무엇을 이야기하려는지 한동안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그러나 읽어갈수록 그의 매력에 빠져들었고, 이렇게 빨리 이 책을 완독하게 될 줄 정말 몰랐다. (베스트셀러는 확실히 다르구나!)
나는 개인적으로, 1년 넘게 폴댄스 일기를 쓰고 있다. 봉을 잡고 도는 것뿐인데 뭐가 그렇게 쓸 게 많을까. 참 신기하다. 『월든』을 읽을 때의 신기함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소로는 월든 호숫가라는 단순한 자연의 기록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독특한 철학을 이 책을 리드해나간다. 문명사회의 물질적 풍요보다 정신적 성장과 내면의 자유를 중시한 그는 유물론자로만 치부하기도, 미니멀리즘? 이라는 작은 틀 안에 넣기도, 자연주의라는 숲 속 안에만 가두기에도 ... 너무 너무 아깝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초월주의(Transcendentalism)’라는 개념을 접하게 되었다. 초월주의는 단순한 유물론을 넘어, 인간의 직관과 자연 속에서 신성을 찾는 철학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이 아닌 ‘신성’을 찾는다는 개념이다. 초월주의자들은 기독교처럼 신을 인격적인 존재로 보지 않고, 자연과 인간의 내면에서 신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점에서 초월주의는 기독교 유신론과 다르지만, 무신론적인 철학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소로는 이 책들 통해 성경과 교회를 여러 차례 인용하고 언급하고 있는데, 일부는 부정하거나 비판하면서도 또, 배척하고 있지는 않다.
이런 의미에서, 초월주의와 신앙의 차이에 대한 궁금증도 생겼다. 기독교 유신론은 하나님을 초월적 창조주로 여기며, 성경과 교리를 통해 신을 이해한다. 반면, 초월주의는 개인의 경험과 직관을 통해 신성을 찾는다. 소로는 “나는 내 영혼을 위해 자연에 간다“고 말했다.
이러한 사상은 불교와도 공통점을 갖는다. 불교에서는 부처를 위대한 종교의 시초자로서 신격화하는 경향이 있지만, 정작 부처는 “내게 의존하지 말고 너 자신의 감각을 의지처로 삼아라“고 가르쳤다. 절을 찾는 많은 사람은 자연 속에서 쉼을 얻고 내면의 힘을 단련하며 깨달음을 추구한다. 초월주의와 불교는 자연 속에서 깨달음을 얻는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두 사상에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초월주의는 자연 속에서 신성을 찾는 과정이지만, 불교는 신성을 찾지 않고 무상(無常)과 무아(無我)를 탐구한다. 소로가 추구한 신성은 ‘신적인 요소’, 즉 ‘신’의 개념 안에 있지만, 부처는 신의 개념을 넘어서 고통의 원인과 해탈의 길을 찾는 데 집중했다.
소로가 자연을 서술하는 방식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의 문체마저 자연과 닮아 있었다. 그의 글을 따라가다 보니 문득 작년 여름 혼자 떠난 제주도 여행이 떠올랐다.
곶자왈을 걸으며 숲 해설사의 설명을 들었던 순간, 가파도에서 장엄하게 휘몰아치던 바람, 그리고 스승님과 친구들의 웃음이 스치는 기억들이 떠올랐다. 지극히 평범하고 고요했던 하루 속에서 설명할 수 없는 평온함을 느꼈다. 그 감정을 신앙이라 부를 수도, 철학이라 할 수도 있겠다. 결국, 그것은 인간이기에 느낄 수 있는 지극한 깨달음이었다.
신앙과 철학, 그리고 인간의 깨달음. 『월든』을 통해 나는 이 모든 것이 단순히 하나의 정답으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금 깨닫고는, 소로가 느꼈듯이 내 안에 살아 숨 쉬는 신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인간은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탐구하고, 자신만의 깨달음을 향해 나아간다. 내가 봉 잡고 도는 걸로 깨달음을 얻었듯이, 소로는 자연을 통해, 부처는 수행을 통해,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방식으로 답을 찾아간다. 『월든』이 단순한 자연 예찬을 넘은 걸작인 이유,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묻고 싶다.
당신의 월든 호숫가는 무엇인가요?